[역사속의 오늘-3월 2일]소련 마지막 서기장이자 초대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3월 2일]소련 마지막 서기장이자 초대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3.02 0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31년 오늘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과 최초의 대통령을 지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출생했다.

그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해 동유럽의 민주화와 개혁 및 개방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서구권을 포함한 자유 진영에서는 냉전을 종식한 주인공으로 높이 평가하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권에서는 초강대국 소련을 붕괴시킨 장본인으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냉전을 종식한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퇴임 후 국제 환경보호 운동과 전쟁 난민 아동 구호에 앞장서고 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  

구소련 남서부의 스타브로폴 지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6년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한 후 국영농장의 콤바인 기술자로 일했으며 1955년 모스크바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시작하여 197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농업담당 서기(1978)와 정치국원(1980)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하였고,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1985년 3월 11일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다.

그는 서기장에 당선되자 노쇠하고 부패한 당 간부들을 젊은 관료들로 교체하는 등 집권 초기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으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술 현대화를 표방하고 노동생산성 증대와 부패한 관료기구의 혁신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1986년 이후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경제 개혁 정책과 정치 개방 정책인 ‘글라스노스트’에 착수한다.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통해 소련 사회 전반에 해빙 무드를 조성한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은 언론의 검열과 어용화 그리고 사상 탄압 등을 완화하여 변혁을 추진했으며, 이로 인해 언론은 예전과 달리 정부에 대한 불만과 무능함을 대중에게 알렸고, 정부 당국은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와 영원한 결별을 선언했다.

소련 최초의 민주화 시도였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복수 후보자의 경합 하에 부분적으로 비밀투표가 행해졌고, 시장경제의 요소들이 도입되어 국가의 보조금과 모스크바의 지령에 의존해왔던 산업체들이 스스로 생산ㆍ자금ㆍ이윤을 관리하게 되었다.

또한 소규모의 가내 생산과 개인 영업도 용인되었다. 그러나 국가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는 관료들의 저항은 민중들의 개혁에 대한 열망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상반된 평가

1988년 연방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을 겸한 그는 동유럽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소련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해 여름 동ㆍ서독의 통일을 수락했으며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잔류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등 탈냉전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전체주의 정치를 불식하고 소련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심는 데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자유경제와 계획경제라는 전혀 상반된 두 체제 사이에서 절충을 모색했으나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소련경제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새로운 법령과 개각을 통해 사태의 수습에 노력했으나 경제 파탄, 민중의 욕구불만, 소수민족 국가의 세력 확장 등의 문제로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1991년 8월 쿠데타가 발생한다.

이에 반발하여 보리스 옐친과 솝차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등 개혁파 인사들은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에 집결하여 쿠데타 세력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80만의 시민이 소련 전역에서 반 쿠데타 시위를 벌여 3일 만에 쿠데타는 실패하고 한때 실각한 그는 복권되어 공산당을 해체하여 70년간의 공산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옐친 등의 주도로 1991년 12월 벨라 베자 조약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 연합이 탄생하자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러시아 국민들은 러시아가 소련 붕괴로 인해 사회적으로 혼란해지고 세계적 위상이 추락하자 그를 '조국을 팔아버린 지도자'라고 비판했다.

사임 후 1992년에 국제 환경보호 운동과 전쟁 난민 아동 구호 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했으며, 1993년 4월 국제환경 비정부기구 그린크로스 인터내셔널의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2007년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45인의 환경 영웅'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