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23일]7ㆍ4 남북 공동성명의 주역... ‘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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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23일]7ㆍ4 남북 공동성명의 주역... ‘이후락‘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2.2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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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24년 오늘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2년 5월 대북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북한 주석과 남북비밀회담을 해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낸 이후락이 출생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등을 지낸  이후락은 '3선 개헌ㆍ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ㆍ박동선 공작 사건ㆍ김대중 납치사건' 등을 주도하기도 했다.

1979년 10ㆍ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몰려 1980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후 정치적 활동 없이 지내다 2009년 10월 31일 사망한다.

▲79호실

1924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육군 항공기 정비학교에 입교하여 육군 하사로 임관한다.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었던 박정희가 남조선노동당 사건으로 파면당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 당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했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 후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승진하여 HID(북파공작원)를 총괄하는 주요 업무를 행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혔으며, 귀국 후 1958년 자신의 군번에서 따온 국방부 내의 정보조직인 제79부대(호실)를 창설했다.

제79부대는 미국 CIA 한국지부가 업무 교류를 위해 정보부대의 창설을 제안했고, 국방부 장관 김정렬은 3군 정보요원을 차출해 중앙정보부라는 통합부대를 창설했으며 미국 CIA의 요청으로 이후락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때 이후락은 이승만의 밀명으로 라오스에 잠입해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라오스 정부군의 수장인 우익 노사반(Phoumi Nosavan) 장군을 만나 지원 방안을 검토한 후 이를 바탕으로 백선엽 합동참모의장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을 조직해 파병을 검토했지만, 미국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ㆍ19 직후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제79호실)가 해체되고 그해 11월 중앙 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61년 미국 CIA의 요청으로 이후락은 육군 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 연구실장(차관급)과 국무총리 안보 담당 비서관으로 취임한다. 또한, 제79부대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에 편입된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시절 주한 미국 대사관에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박정희와 그의 주변 인물을 감시하며 쿠데타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별명 '제갈 조조'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이후락은 박정희의 과거 좌익 경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국가재건 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후 공보실장 겸 대한 공론사 이사장직을 겸임하고 ‘Korea Republic’ 지를 개편 발행하면서 주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정권의 홍보를 담당한다.

1963년 12월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후락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어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 수석 비서관 등과 함께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제갈량의 지략과 조조의 지도력을 겸비했다고 해서 '제갈 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 이만섭 등 민주공화당 소속 일부 국회의원들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부정부패와 3선 개헌의 막후 원흉으로 지목되어 김형욱과 같이 해임되었고 이후 지병으로 사망한 엄민영의 후임으로 주일본 대사로 임명된다. 

1970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그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 총지휘권을 맡아 검찰, 경찰, 지방자치단체, 육군 보안사령부 등 관권 조직을 총동원하여 김대중 후보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박정희 정부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1970년대 초부터 북한과의 협상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게 했다.

1972년 5월 4일 새벽, 이후락은 김일성과 남북 비밀회담을 했으며 그 결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확인하고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 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7ㆍ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후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1973년 12월 수도경비 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문제가 된 ‘윤필용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박정희에게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후락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고,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결국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이 사건의 내용은 1998년 미국 국가안보 기록보관소의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후 1973년 심장병 치유를 이유로 영국령인 바하마 제도로 출국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로 다시 귀국한 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 1978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다음 해에 민주공화당으로 입당한다. 

그러나 10ㆍ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그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은퇴한 후 1982년 울산 장학회를 만들어 장학 사업을 벌인 것 이외에는 다른 특별한 활동 없이 지내다 2009년 10월 31일 사망하여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으로는 금성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1등 수교훈장, 동성무공훈장, 미국 리전 오브 메리트(Legionof Merit) 훈장 등이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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