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2월 17일] 독립운동가 ‘고이허’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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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2월 17일] 독립운동가 ‘고이허’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2.17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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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1937년 오늘 독립운동가 고이허(1902년 9월 5일 ~ 1937년 2월 17일)가 사망한 날이다. 그의 본명은 최용성이다.

▲ 독립 투쟁

고이허는 황해도 수안 출신으로 경성부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뒤 곧바로 만주에 망명한 그는 지린에서 계몽 운동과 농촌 개발 운동을 벌이던 김진호, 변창근 등을 만나 ‘화이더농우회’에 가담해 활동을 했다.

1925년 그는 정의부에서 일하던 김진호의 소개로 정의부에 가입해 삼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1929년 4월, 고이허는 삼부통일회에서 국민부 조직 선언을 할 때 가담해 23인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청년 조직을 담당했다. 지도 조직인 조선혁명당, 무장 투쟁을 위한 조선혁명군도 결성했다.

1932년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 부사령관 장세용 등이 한꺼번에 체포되었으나, 그는 양세봉 등 살아남은 인사들과 함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재정비하고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이던 양세봉이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중앙집행위원장 대리로 고군분투 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1936년 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 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조선혁명군이 활동하고 있던 동변도 일대 지역에 대한 탄압이 거셌다. 이에 조선혁명군정부의 주요기관과 간부들은 관전현 보달원으로 옮겨 투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고이허는 1936년 12월 경 호위대원 6명과 함께 보달원으로 갔다가 보달원 서건구자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만나 전투를 벌이다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이후 그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전향을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1937년 2월 17일 선양시의 봉천성 밖 동릉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나이 향년 35세였다. 

▲ 상훈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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