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5일] 독립운동가 박시창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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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5일] 독립운동가 박시창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2.05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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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창
박시창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00년 2월 5일은 대한제국 경기도 시흥에서 독립운동가이자 육군 소장을 지낸 박시창이 태어난 날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의 양자이며 생부 박해겸은 양부 박은식의 6촌 동생이다.

박시창은 일찍이 대한독립군에 투신했고 한국광복군에서도 복무했으며, 8·15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도 참여한다.

한국 전쟁 참전 후에는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예하 연대장·국방부 병무담당관·육군본부 정훈참모부장·육군 제3사단장 직무대리·육군 제8사단장 등을 거쳐 육군 제1군단 부군단장을 두루 역임하다 1959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76년 광복회 회장을 지낸 박시창은 1986년 6월 7일을 향년 87세로 별세,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 성장 과정과 독립운동 투신

박시창은 밀양 박씨 가문에서 박해겸의 3남 5녀 중 막내아들이자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는 한때 한성부와 경기도 인천 제물포, 경기도 파주를 거쳐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04년 2월 29일을 기해 경기도 시흥에 귀향해 성장했으며, 6세 때였던 1905년 11월 1일 슬하 3녀만을 두었던 7촌 재종숙 박은식에게 입양돼 이후 황해도 황주에서 자랐다.

박시창은 1923년경 남경 중앙대학에 수학하다가 휴학을 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학비 등 생활고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남경에서 상해로 돌아온 그는 이후 조선인청년동맹회에 가입, 독립운동의 길에 발을 들여 놓는다.

▲ 독립운동에 바친 젊은 시절

상해지역의 청년 회원 117명을 보유한 동맹회의 목적은 혁명적 정신을 고취하고 단합적 행동을 훈련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1925년 11월, 박시창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부친이자 독립운동계의 원로였던 박은식이 평소 소원이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 상해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냈던 그에 대한 장례는 국장례로 거행됐다. 1926년경, 박시창은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한다.

이곳에 수학하던 박시창은 1926년 7월 중국의 제1차 북벌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 참전했다.

한편 1926년 10월 중국 국민혁명군이 우한에 입성하고 이곳에 북벌군의 초급 간부 확충을 목적으로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가 설립된다.

1927년 7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후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독립운동에 참여했다.

▲ 의열단에서의 활동

박시창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운 의열단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활동을 이어갔다.

1919년 창설된 의열단은 1926년 이후 단의 주력이 혁명의 성지였던 광동성 광저우로 집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의열단은 한인 운동자들과 황포군교 입교생들 가운데 다수의 신입자를 충원함으로써 조직세가 크게 신장됐다.

이때 박시창은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에 다녔던 진공목, 진갑수, 안재환, 김영재, 송욱동, 장기준, 그리고 중국군 기술교관으로 있었던 백득림, 홍의균, 권준, 전창무, 노세방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하게 된다.

혁명청년회는 안으로는 동지들에 대한 훈련에 치중하는 한편 밖으로는 독립운동의 선전사업을 펼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 후 박시창은 1928년 남경의 군관단 입대를 거쳐 이듬해 국민혁명군 경위군에서 8년 동안 복무했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87사단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제87사단은 1932년의 상해사변에 투입되었던 정예부대였다.

▲ 해방 이후의 행적

박시창 선생은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의용대와 조선광복군에서 참모로 활약을 계속했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일본군에 동원됐던 한인청년들을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기 위해 힘썼다.

8·15 광복 후 귀국해 국군창설에 참여했고, 6·25전쟁을 전후해 연대장·사단장·군단장 등을 역임한 뒤 1959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만년에는 별다른 공직을 가지지 않고 지내다가 1976년 안춘생(安椿生)의 뒤를 이어 제5대 광복회 회장으로 일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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