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16일]북한 ‘민간 여객기 창랑호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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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16일]북한 ‘민간 여객기 창랑호 납치‘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2.16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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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58년 오늘 한국 최초의 민항사인 대한 국민 항공사(Korea National Air ; KNA)의 여객기 창랑호가 경기도 평택시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됐다.  

북한은 그해 3월 6일 납북 승객을 송환한다고 발표하였고, 같은 날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 회의에서 인수 절차가 논의되었다. 납치범을 제외한 승객과 승무원 26명은 같은 날 오후 7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으나 창랑호는 끝내 반환받지 못했다.

창랑호 사건 이후 한국 정부와 항공사는 재발 방지를 위해 항공기 탑승자의 총기 등 위험물 소지에 대한 단속과 항공기 운항에 대한 공중 감시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1년 뒤인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동아일보 창랑호 월북기사
동아일보 창랑호 월북기사

▲공중 납치된 HL106

사건 당일 오전 11시 30분 창랑호는 승객 31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부산 수영비행장을 출발하여 서울 여의도 공항으로 향하던 중 12시 40분경 평택 상공에서 김택선 등 남파공작원 5명과 방조자 2명에게 공중 납치되었다. 납치범들은 총기로 조종사를 위협하여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의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시켰다.

탑승자 중에는 미국인 기장과 부기장 외에도 미군 군사고문 단원(중령) 1명과 독일인 부부 등 외국인 승객 3명과 유봉순 국회의원,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 등 고위 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 국민 항공사가 '의거 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거짓 발표했으나, 실상은 그 당시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의 평양 방문 때 창랑호가 자진 월북한 것처럼 꾸며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는 설이 있다.

우리 정부는 그해 2월 22일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에 협력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UN군은 군사정전위원회에 수석 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그리고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는 한편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압력을 가하였고, 승객이 포함된 미국과 독일 정부도 승객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북한은 그해 3월 6일 판문점을 통해 승객을 송환하였으나 창랑호의 기체는 반환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국민 항공사는 운영상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당시 만송호ㆍ창랑호ㆍ우남호 등 3대의 항공기를 운영하고 있던 KNA는 1957년 만송호가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도중 기체가 크게 파손되어 전손 처리되었고 창랑호는 납북되어 우남호 하나만 운영되었기 때문에 큰 손실을 보게 된다. 1961년 이를 해결하지 못한 KNA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신용욱 대표는 한강에 투신자살하였고, 그해 11월 항공사는 폐업 처리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KNA를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했지만, 부채가 너무 크고 다양한 부실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어 구제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한항공공사법을 제정하여 1962년 9월 대한항공을 설립하여 국영기업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나 대한항공공사가 결항률 18%와 각종 정비 문제가 발생하자 민영화를 결정하고 1968년에 한진그룹이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된다.

한편 탑승자 중 김기완 대령은 주한 미 대사를 역임한 성 김의 아버지이자 손지창과 임재범의 고모부이다. 그는 주일 영사로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KNA의 창업자인 신용욱은 1953년 동양인 최초로 3천 시간 무사고 비행기록을 세운 실력 있는 조종사로 1950년과 1954년에 민의원에 당선된 정치인이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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