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 2월1일]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 '지석영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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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 2월1일]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 '지석영선생' 타계
  • 장석호 기자
  • 승인 2021.02.01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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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지석영 선생

[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기자] 1935년 오늘,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이자 한의사, 한글 학자이자 대한제국의 문관, 한의사(의생), 한의학자, 정치인, 한글학자, 국어학자, 교육자, 저술가였던 지석영 선생이 타계했다. 

종두법의 하나인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했다.

생애

그는 185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지익룡은 근교에 한약과 침으로 이름난 유의였다. '유의'란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지석영은 어려서부터 의학에 대한 관심이 컸고, 특히 일찍부터 중국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어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우두 접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역시 명의로 칭송이 자자하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 보고 감명을 받았고,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 간 우두법을 배웠다.

지석영 동상
지석영 동상

그해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했다.

서울에는 종두장을 설치했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고, 1887년 공가(貢價)와 화폐 문제에 대하여 상소했다.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했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1894년에는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군 토벌에 참여했다.

1894년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됐고, 1895년 동래부 관찰사(東萊府觀察使)가 됐다.

1896년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했으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할 때 학감이 되었으나 한일합방 후(1910년)에 사직했다.

이후에는 (한방)소아과를 특히 주요 진료를 했고, 1915년에는 전국조선의생대회(全國朝鮮醫生大會. 현 한의사협회의 전신)가 열리고 회장을 맡았다.

일제는 보안법 1조로 조선 의생회의 해산을 명하고 관계자인 지석영 선생을 필두로 김성기, 최동섭, 경도학, 장기학, 윤용배, 조병근, 박인서 등 의생들을 종로경찰서로 초취하여 금후 다시는 이와 같은 회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게 한다. 그리고 1916년 조선의생회는 일제의 압박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지석영은 나라의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05년에는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해 공포하게 했다.

또한 그는 여러 외래 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여 한국어의 발전과 보급에도 노력했다.

지석영은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게 했으며, 1908년에는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됐다.

또한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해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조선의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로, 종두에 대한 알기 쉬운 서적을 저술해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해 병에 걸린 이들을 구제했다.

한글 보급까지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팔괘장과 태극장을 받았다.

출처 : 위키백과, 인터넷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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