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87년 오늘 일제강점기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태평양전쟁의 B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언도받고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처형된 일본군 육군 중장 홍사익이 출생했다.
조선인으로는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고 일본군에서 정식 코스를 밟아 장군이 된 사람은 그가 유일하며, 일제 강점기 36년간 평민으로서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홍사익뿐이다.
그는 1966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고,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작성한 705명의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어있다.
▲군인의 꿈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막내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형 홍사용 밑에서 자랐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으며 사서오경을 통째로 암기할 만큼 영특했다.
소년 시절 과거 시험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 제도가 폐지되어 집안 아저씨뻘인 육군 무관학교 교관 홍중유의 권고로 군인에 뜻을 품는다.
1905년 9월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군대가 폐지되고 1909년 9월에는 일제에 의해 육군 무관학교가 폐지되자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 중앙 유년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졸업 후 수습 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일본이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자 그의 동기생 중 지대형은 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하다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되고 1920년 12월에는 육군대학교에 합격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다.
3.1 운동 이후 3년 선배 김광서 중위, 동기 지대형 중위, 1년 후배 이종혁 중위가 차례로 소속 부대에서 탈영해 만주로 망명했으며, 이청천이란 가명으로 독립군 대장으로 활약한 지대형은 그에게 수시로 사람을 보내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집안의 생계와 군대가 좋았던 그는 끝내 일본 군복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음의 빚을 덜고자 가장이 독립군에 가담해 심각한 생활고에 빠진 김광서와 지대형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조선인 장군
3년 동안의 육군대학 교육을 마친 홍사익은 중대장, 참모본부 전사 편찬 담당관, 대대장, 관동군사령부 군정부 고문, 육군 보병학교 교관, 만주국 중앙 육군 훈련처 교관, 상하이 흥아원 조사관 등을 거쳐 1941년 임관 27년 만에 소장으로 진급한다.
소장으로 진급하고, 북지 파견 사령부에 배속되어,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북지 사령부 예하 보병 제108 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 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 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1941년 12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 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화북지대를 지휘하던 윤세주는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다. '일본군 토벌대의 지휘관'과 '무장독립부대의 지휘관' 모두가 조선인이었던 이 전투는 역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중국에서 여단장 및 일본 육군 공주령 학교 부교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3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 총군 총사령부의 병참 총감에 임명되었고, 약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면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일본 남방 총군은 1945년 8월 루손 섬 산악지대에서 고립된 상태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패전을 맞은 후 그는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 처우와 포로 학대, 살해의 원인 제공 혐의로 필리핀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그해 12월 다른 일본군 장성 22명과 함께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투옥된다.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 학대 살해' 죄목으로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4월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 전범 수용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조선인으로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올랐으며 그를 유독 미워한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아들 홍국선이 한국은행에 근무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직접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파면시켰다.
그의 출생연대는 불분명하여 호적상 생년월일은 1887년 2월 2일이고, 묘비 문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889년 3월 4일로 여기서는 호적상 생년월일을 따른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