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 1월 25일] 일본출신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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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 1월 25일] 일본출신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 장석호 기자
  • 승인 2021.01.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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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기자]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혹은 박문자(朴文子, 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에 묘가 있다.

생애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박열(좌)과 가네코 후미코(우)
박열(좌)과 가네코 후미코(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 신고가 되지 못해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했다.

3·1 운동을 목격한 후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나,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과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서 노동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받아 아나키스트가 되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됐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후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했다.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으며, 이면으로는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 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다.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고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당했다.

그녀는 천황을 암살하려한, 소위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받았다.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일본 제국 내에 시신을 거둬 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씨 문중의 사람이 됐다.

여사의 묘는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됐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혀졌다.

그러다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현재 위치인 박열의사기념관 내로 이장하게 됐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2018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 위키백과 / 인터넷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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