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22일] 조선 개국공신 하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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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22일] 조선 개국공신 하륜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1.22 10:4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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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하륜 출생 비석
진주성 하륜 출생 비석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348년 1월 22일은 경상도 진주에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조선 개국공인 하륜이 태어났다.

하륜은 관료로서의 활약 뿐 아니라 이인복, 이색의 문인으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이후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으며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직접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연이어 이방원을 도왔다.

그 공으로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됐으며 1416년 관직에서 은퇴 후 객사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생애 초반부

호정 하륜은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과 찬성사 강승유의 딸 진주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를 지낸 하시원이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된다.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정몽주의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권근과도 친분이 있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 합격, 국자감의 유생이 되었다. 5년이 지난 1365년에는 문과에 급제, 관료의 길을 가게 된다.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하륜의 인품을 높이 사 아우인 이인미의 딸과 결혼시켰다.

▲ 관료로서의 길

1367년 하륜은 춘추관 검열(檢閱)·공봉(供奉)을 거쳐 이듬해 감찰규정에 시보됐다.

당시 그는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 양전부사의 비행을 탄핵했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들어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파직됐다.

1371년 신돈이 사형 당하자 복직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됐으며, 영주목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가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해 보고했다.

이어서 고공좌랑, 판도좌랑으로서 교주·강릉도찰방을 지냈다. 1374년에는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다.

공민왕 말년부터 하륜은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서부령 지제교(典校署副令知製敎)·전의감부령(典儀監副令)·전법서총랑(典法署摠郎)·보문각직제학·판도서총랑(版圖署摠郎)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1380년(우왕 6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 조선 건국 동참

그는 스승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이후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과 조선 건국에 참여한다.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7월초 고려가 멸망하자 하륜은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가,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로 기용됐다.

이때 그는 경기도의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393년(태조 2)에 수도 천도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 건도역사의 부당함을 역설해 중지시켰다.

무악으로의 천도를 강력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1394년 중추원첨서사로 전보됐다. 1395년에는 부친상으로 사직했다가 후일 복직한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 틈틈이 문인들을 길러냈는데 그의 문인 중에선 세종 때의 명재상 중 한 사람인 윤회 등이 배출되기도 했다.

▲ 태종의 최측근으로서의 업적

1, 2차 왕자의 난에서 정안대군(이방원)을 적극적으로 도운 그는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진산부원군,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됐다.

그는 태종에게 스스로 창업과 수성의 방책으로 '변통'(變通)을 제시했다. 또 학문은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그때그때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태종 치세에 하륜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로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관제를 개혁했다.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의 유통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또한 좌주문생제의 혁파나 호패법의 실시, 신문고의 설치 등을 성사시켰다. 다만 하륜은 태종이나 다른 주변 인물들과의 사적 관계에 의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인사 청탁을 받는다거나 국사를 태종과의 밀담으로 처리해 버린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륜은 시문에 능한 인물이며 이색, 이인복에게 배운 성리학 학문 외에도 음양, 의술, 풍수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췄다. 개국 직후 대명외교에 차질이 없도록 한 것도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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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1-01-23 00:02:10
교황성하의 신성성도 변하지 않더군요.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교과서 교육은 거의 변할 사유가 없을것입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39

윤진한 2021-01-23 00:01:31
원.명.청의 국자감은 베이징대로 승계됨), 서유럽의 볼로냐.파리대학 교육. 이러한 세계사의 교육은 국제관습법으로 존중받는 영역임. 세계사의 교황은 교황성하로 지위가 높고 가톨릭국가들의 구심점인데, 서강대는 교황윤허로 설립이 기획되어 설립된 예수회(교황청의 실세,귀족출신 사제 이나시오가 설립)산하의 Royal대학임. 현행헌법 임시정부 반영(을사조약.한일병합 무효,대일선전포고). 주권없는 패전국奴隸.賤民 왜구 서울대와 추종세력의 대중언론 도전은 헌법이나 국사 성균관자격(성균관대) 못 이깁니다.대중언론에서 아무리 공격당해도 국사 성균관(성균관대), 한나라 태학.이후의 국자감(베이징대로 승계), 볼로냐.파리대학의 교과서 자격은 변하지 않더군요. 세계종교 유교와 로마 가톨릭도 그렇습니다.교황성하의 신성성도 변하지

윤진한 2021-01-23 00:00:39
위키백과는 익명의 다중이 참여하는 창작물에 가까움. 성격은 그러함. Royal성균관대(한국최고대)와 서강대(성대다음)는일류,명문. 法.교과서>입시점수 중요. 미군정法(미군정때 성균관복구 법령발효)에 의해, 국사 성균관 자격은 성균관대로 정통승계, 해방후 국사교육으로 현재까지 성균관대 자격으로 이어짐.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때 시작해 노태우대통령때 발행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대통령령에 의해 발행되어 행정법상 자격가짐)에서 해방후 성균관대가 조선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하였다고 공식화하여 성균관대의 국사 성균관 자격승계는 법으로 더 보강됨. 서강대는 교황윤허 대학임. 국내법과 달리 강행법은 아니지만 국제관습법이 있음.세계사의 4대문명이나, 세계종교 유교, 가톨릭,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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