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 21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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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 21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서거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1.2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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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조선의 제26대 국왕(재위:1864년 1월21일~1897년 10월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 10월12일~1907년 7월19일)인 고종(1852년 9월8일~1919년 1월21일, 광무황제)이 승하한 날이다.

휘는 희로 초명은 재황, 아명은 명복, 초자는 명부, 본관은 전주, 자는 성림, 호는 주연, 정식 묘호는 ‘고종(高宗)’이고 재위 중 연호는 개국, 건양, 광무이다.

▲ 출생과 즉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고종황제 어진

고종은 1852년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됐다.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본관이 여흥, 민치구의 딸로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고 훗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됐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중전으로 삼았다.

고종이 11세에 불과해 대왕대비 조씨는 수렴청정을 했고 흥선군은 대원군으로 집권해 국왕의 생부가 생존해 통치하는 전례 없는 일이 생겼다.

▲ 대원군과 대립

대원군의 집정시대(10년)에는 척신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한강 양화진의 포대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 치적이 있다.

그러나,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인 당백전의 주조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명의 교도 학살, 통상수교거부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겼다.

이로 인해 1873년(고종 10년) 11월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은 친정을 선포한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정권은 왕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해 민씨 척족정권은 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과는 달리 대외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국교 관계를 맺는다.

이와함께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과 함께 개화 시책을 추진하고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파견하는 등 ‘개화문명’을 수용했다.

▲ 개화파와 수구파 대립

개화 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대립이 점차 첨예화되어 갔다.

1881년 황쭌셴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의 유입·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을 일으키는 등 민씨정권을 규탄한다.

안기영 등은 국왕의 이복형인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일어났으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고종과 민씨정권은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해 정국을 수습했다.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려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계속된 알력으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임오군란을 이용해 흥선대원군이 구식 군대의 세력을 업고 정권을 장악했고 갑신정변으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등 왕권은 큰 도전을 받는다.

또, 임오군란 이후 친청화한 민씨정권은 계속 국정을 논단하면서도 급격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게 되어 청나라의 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 대한제국 수립

일본은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 탈취에 혈안이 되어 고종은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된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는 친일 정객과 모의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왕궁을 습격해 왕후 민씨를 살해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고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 조처까지 취하게 됐다.

그러나, 얼마 뒤 왕후 민씨를 복위토록 하는 조서를 내려 빈전을 태원전에 설치한 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존하고 홍릉에 국장한다.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해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 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 정객과 내통해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그러나 친러 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게 이른다.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고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 선포와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 퇴위와 승하

대한제국 고종 황제
대한제국 고종 황제

1898년 7월 안경수는 현역과 퇴역 군인들을 동원한 황제 양위를 음모하고 9월에는 정계를 농락하다 유배된 김홍륙이 독다사건을 일으키는 등 고종에게 위험을 가했으나 무산했다.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맹렬하게 개최되고 자유민권운동이 확산되자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한 고종은 1900년 둘째 아들을 의친왕과 셋째 아들을 영친왕을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를 계비로 맞는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황제 폐립을 음모했으나 무사히 정권을 이어가던 중 일본의 군사적 압력으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와 한일협약을 맺는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해 반대했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된다.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고 1905년 11월 26일자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 미국 공사와 한국 정부의 고문인 헐버트(Hulbert)에게 밀서를 보내 미국 정부에 전하도록 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 미국은 도움을 줄수 없었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해 조선 국정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파견한다.

또,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 특사 활동에 원조해 주기를 청하지만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송병준 등 친일 매국 대신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한다.

고종의 장례 행렬
고종의 장례 행렬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고 태황제가 되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에 승하했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내 인산례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과 3·1만세운동의 계기가 됐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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