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26일]‘아관파천‘의 주역... 이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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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26일]‘아관파천‘의 주역... 이범진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1.26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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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11년 오늘 조선 말기의 아관파천을 단행, 친일정권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사시킨 이범진(1852년 9월3일 ~ 1911년 1월26일)이 사망했다.

그는 헤이그 특사를 도와 문건을 작성하고 그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특사로 파견되었던 아들 이위종에게 1만 루블을 지참시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동의회’의 조직 구성과 활동을 후원했다.

조국의 일본합방에 절망하여 자결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있는 우스펜스키 묘지(현재의 북방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소련 시절의 대대적인 묘지 재구획 공사로 그의 유해가 멸실되자 그 구역에 2007년 7월 대한민국 정부는 이범진 순국비를 세웠다.

이범진이범진 (1852~1911)[사진 제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범진 [사진 제공=한국민족문화대백과]

▲친러 내각 구성

이범진은 조선 말기 어영대장 등을 지낸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 로스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로 이끈 이경하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법부대신 서리 직책에 올랐지만,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10월 춘생문 사건의 실패로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1896년 귀국했다.

이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에 성공하여 친러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에 임명되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밝히고자 했으나 그 배후에 주한 일본공사가 있어 도리어 일제의 위협을 받게 된다.

▲애국 외교관

일본의 압박으로 신변이 위험해진 그는 1896년 말부터 3년 동안 주미 공사로 근무하다 1899년 중반에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겸임 공사로 임명되어 1900년 초 파리로 부임했으며, 이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견제와 간섭을 피하려고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는 초대 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된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노력을 했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종 황제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사이의 이해를 증진하고자 가교 구실을 충실하게 했다. 

1905년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하고 각국 주재 공사들을 소환하자 그는 이에 불복하고 양국 황제의 밀사 명목으로 6년여 동안 공사관을 유지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907년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ㆍ이준 등을 특사로 파견하자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평화 회의에 제출할 문건인 ‘공고사’를 불어로 작성해 인쇄했다.

그리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이위종을 특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행하게 하고 러시아 황제에게 대한제국 특사단의 신변 보호를 청원하여 특사단이 헤이그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 특사들이 연설한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 특사 파견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을사늑약 이후 연해주는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망명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새로운 무대가 되고 있어 그는 먼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한인 신문의 간행을 역설하며 해조 신문 창간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최재형과 이범윤이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할 때 이위종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 이겨 1911년 1월 목을 맨 상태에서 세 발의 권총을 쏘아 자결했다. 그의 남은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분배하였으며 그 가운데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민족주의 교육기관으로 한민학교가  양옥 교사를 신축할 때 그 자금이 제공되었다.

이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공의 기려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그는 “태황제 폐하께. 우리 대한제국은 패망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신은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어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국권을 회복할 방책이 없다면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은 격분의 정을 이겨낼 수 없기에 오늘 목숨을 끊습니다.”라고 유서를 남겼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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