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월 13일] 의주 3·1운동 주역 ‘유여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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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월 13일] 의주 3·1운동 주역 ‘유여대 목사’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1.1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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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유여대(1878년 11월 26일 ~ 1937년 1월 13일)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다. 의주 만세운동 주동자로 호는 낙포 이다. 어려서 사숙에서 한문을 배우고 1895년 서당을 세워 아동들을 가르쳤다. 

유여대 목사
유여대 목사

계몽활동

유여대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한학을 익혀 23세 때에 의주에서 양실학교를 설립했다.

27세 때 의주서교회당에서 미국 선교사 위대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이후 전도사가 되어 송장면 교회, 수진면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 사업을 하다가 1909년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랬듯이 그는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주에서 일신학교와 여학교인 양실학원을 세워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퇴치‧민중계몽에 힘썼다.

독립운동

1919년 2월 선천의 양전백 집에서 이승훈을 만나 다음 달에 있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그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경성부에서 열린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당시 의주지역에서 정명채, 김두칠, 도형균, 안석응, 강용상, 허상련 등 20여명의 협조를 얻어 만세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수립하고 당일 자신이 이끄는 기독교 신자, 양실학교 생도 200여명, 그외 부형 등 700∼800여명을 모아 독립창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독립선언서를 배포,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헌병에게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의주로 다시 돌아와서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신의주로 이주한 후 1937년 1월 13일 별세해 신의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일생 계몽 운동과 교육 사업, 문맹퇴치운동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졌었다. 이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으며, 저서로 위인전 모음인 ‘위인기담’(1934)과 기초 상식 교육서인 ‘면무식’(1935) 등이 있다.

다음은 유여대와 일행이 독립선언서를 배포·낭독하고 합창했던 ‘독립 창가’이다.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의 주의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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