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 1월 4일] 한말의 의병장 '노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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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 1월 4일] 한말의 의병장 '노응규'
  • 장석호 기자
  • 승인 2021.01.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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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 의병장
노응규 의병장

[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기자] 1907년 오늘, 옥사한 노응규(1849년 3월15일 ~ 1907년 1월4일)는 조선말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종증조부이기도 하다.

노응규는 경상남도 함양 태생으로 유명한 유학자인 허전의 제자였으며, 위정척사론의 거두인 최익현과 송병선, 송근수에게서도 사사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진데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거병하게 되었는데, 노응규도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인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은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노응규를 총대장으로 한 진주의병진을 구성하게 됐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해 김해까지 손에 넣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개입에 밀려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노응규 의병진 일부는 행패를 부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매천 황현의 증언에 의하면 1897년 초 노응규 등은 진주에서 웅거하면서 전 경내를 분탕하니 주민들은 동학교도들의 행패를 만났다고 말했다.

이 일로 가족들이 피살되는 불행 속에 노응규는 호남 지방에서 피신하던 중, 1897년말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상소를 올려 사면을 받았다.

이후 여러 나라의 세력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고종은 을미사변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유학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했고, 그도 규장각 주사와 동궁시종관 등의 직책을 맡아 고종과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의 피탈이 가시화되었고,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됐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다시 거사를 준비해 그해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년 47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응규의 상소문 대략과 고종 황제의 비답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노응규는 대한제국 광무1년(1897년)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에서 "아, 신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나섰다가 나라의 원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의 화란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위로는 폐하에게 충성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부모에게 효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째 죄입니다.

군사들이 내려오는 날에 신은 비록 감히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았으나 또한 스스로 잡혀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숨겨 멀리 도망친 것이 둘째 죄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줄 사람이 없이 지금 이미 1년이 지났는데 아직 상복도 입지 못하여 자식으로서의 의리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옛날의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 사람들은 시퍼런 칼날이나 끓는 물, 타는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신은 구차하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직까지 하나의 대책이나 한 가지의 꾀도 내놓지 못하고 자고 먹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보통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넷째 죄입니다.

신은 이처럼 네 가지의 큰 죄가 있으나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있으니 어찌 한 치의 비수나 한 자의 끈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죽는 것도 도리가 있으니 오직 나라의 법에 의해 죽어야만 그 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나라의 법을 신에게 적용하여 드러내놓고 처단함으로써 세상의 신하와 자식으로 된 사람들로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할 줄 알게 한다면 신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하니

고종이 비답하기를, “네가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으니, 그것이 가상하다. 깨닫고 개진하는 것이 너의 도리일 것이다.”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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