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 31일] 19세로 생을 마감한 ‘조선 8대 국왕 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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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 31일] 19세로 생을 마감한 ‘조선 8대 국왕 예종’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12.3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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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조선의 8대 국왕인 예종(1450년 1월 14일~1469년 12월 31일, 재위 1468년~1469년)이 19세 나이로 승하한 날이다.

성은 이(李), 휘는 황(晄)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명조 또는 평남, 시호는 ‘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으로 세조(조선 7대 국왕)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 왕세자 책봉과 즉위

창릉 홍상문
창릉 홍상문

1450년(세종 32년) 정월 정축일에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해양대군으로 봉해졌으나 형인 의경세자가 1457년 9월 사망하자 왕세자로 책봉됐다.

그는 1460년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장순왕후)으로 맞이했다.그러나 그녀는 1461년 12월 31일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며칠 뒤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이후 1463년(세조 9년)에 간택 후궁인 한백륜의 딸 소훈 한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1468년9월22일 병환이 깊어진 세조의 선위로 그는 수강궁 중문에서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 치세

재위 중 ‘직전수조법’을 제정해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무관이자 병조판서였던 남이를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며 왕권을 강화했다.

남이와 강순등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처형하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매우 엄격한 통치를 지향했다.

예종은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경국대전’을 완성했지만 이를 반포하지 못한 채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진시에 자미당(紫薇堂)에서 승하했다.

사인은 봉와직염의 악화로 인한 패혈증으로 추정된다.

▲ 사후

창릉 능침
창릉 능침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로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고 저술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며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몇 해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예종의 둘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부인 임씨의 딸로 태어나 1463년(세조 9년)에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내명부 세자궁 종5품)으로 간택되어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1470년(성종 1년) 의경세자의 의묘(경릉) 북쪽에 능을 조성했다가 1498년 안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1499년(연산군 5년) 현재의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창릉’으로 조성해 있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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