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22일]한글 대중화와 근대화의 개척자 ‘주시경‘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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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22일]한글 대중화와 근대화의 개척자 ‘주시경‘선생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2.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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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76년 오늘(음력 11월 7일)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연구와 제자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주시경이 출생했다.

그는 훈민정음을 ‘한글’이라고 이름 붙이고 통일된 표기법과 나라에서 국어 연구와 사전을 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어국문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국어ㆍ국문의 연구와 그 보급을 통해 애국 계몽운동에 헌신한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주시경 (1876 - 1914)
주시경 (1876 - 1914)
(사진제공=독립기념관)

▲한글 사랑

가난한 지식인인 주면석의 둘째 아들로 출생해, 작은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한문에 회의를 느껴 국어국문 연구에 뜻을 품는다.

1893년 야학에서 배재학당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에게 신학문을 배우던 중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자국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수학・영어・지리・역사 등을 공부했고, 1896년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했을 때 당시 지지학 강사였던 서재필과 만나게 된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에 서재필과 함께 깊이 참여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과 동시에 회계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총무 겸 교보원으로 재직했다.

그해 5월 국문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최초의 국문 연구회인 ‘국문 동식회’를 사내에 조직하였고 이후 국문 담당 조필로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 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를 실천해 갔다.

독립신문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도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근대 인권과 민권 사상, 그리고 남녀평등 사상 등은 일반 민중의 의식과 사상을 변혁시켜 이들이 이후 근대 민족운동의 주력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양홍묵, 신흥우, 이승만 등과 함께 배재학당의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하여 전적 겸 ‘협성회 회보’ 저술 위원으로, 후에는 제의라는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한글 연구과 구국운동 

1897년 12월 독립협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 1898년에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헌의 6조’의 실행을 요구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반 민중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반정부, 반침략 투쟁을 펼쳤다. 그해 12월 친러 수구파 정부가 기습적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그는 황해도 친척 집으로 은신했다. 

이후 다시 상경하여 제국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였고, 1900년 상동 청년 학원에 국어문법 과를 신설하여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최초로 국어문법을 교육하는 한편 국어국문 연구에 매진한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자 국어문법을 확립ㆍ보급하기 위해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 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으로 연계한다.

1906년 ‘대한 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7년 지석영이 설립한 국어연구회에 이준의 추천으로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한다. 또한 그가 주장한 상소로 1907년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연구위원이 되어 ‘국문 연구 안’을 제출한다.

이후 1908년 ‘국어 문전 음학’을 발간하고 1909년 전 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국어 맞춤법 해설서인 ‘국문 초학’과 1910년 4월 ‘국어문법’을 간행한다.

1910년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보급하기 위해 광문회에 가입해 ‘훈몽자회’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를 간행하고, 그의 제자들과 함께 국어사전인 ‘말모이’의 편찬 작업에 착수한다. 이후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 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세웠다.

그는 국어와 국문을 매우 일찍이 연구하여 독창적인 문법 체계를 정립하였고, 애국 계몽운동에 헌신한 선각적 애국자로 일제의 한국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국어와 국문을 지키고 발전시켜 민족문화를 보존하여 독립의 기초를 공고하게 다졌다.

또한, 후진 양성을 위해 1906년부터 서울의 중학교 열여덟 곳을 돌아다니며 국어 선생님으로 일했고, ‘조선어 강습원’을 세워 일요일마다 한글을 가르쳤으며, 가르칠 책을 커다란 보자기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다녀 사람들은 그를 ‘주 보따리’라고 불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많은 제자에게 이어져 1921년 ‘조선어 연구회’가 만들어졌으며,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해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으며 오늘날 한글 학회의 뿌리가 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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