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15일]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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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15일]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2.1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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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87년 오늘(음력) 초대 대법원장 겸 법전 편찬위원장을 지내면서 법질서 확립에 큰 공헌을 한 김병로가 출생한 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 관련 각종 사건에 무료 변론을 맡았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억압하기 위해 제정ㆍ적용한 보안법, 치안유지법, 신문지법, 집회취체령 등에 맞서 싸웠던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도 노력했다.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이 절대 명제였던 그는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하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립이 잦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도 노력했다.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으며, 그의 후손으로는 아들 김재열과 손자 김종인이 있다.

김병로
김병로

▲인권 변호사

그는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출생하여 청년 시절에 당대의 큰 유학자였던 간재 전우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이후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의 의병 부대에 가담하여 을사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1906년 창평군의 창흥학교에 입학했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두 학교를 동시에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 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한 뒤 경성 전수 학교와 보성 법률 상업학교에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했으며, 1919년 경성 지방 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했으며, 1923년 허헌ㆍ이인ㆍ김태영 등과  함께 서울 인사동에 형사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여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 임을 주장했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그는 교육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조선 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다. 

이어 당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던 세력들을 통합시키고자 1927년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입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광주를 찾아 진상을 조사하고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시정을 촉구했다.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 사건의 변론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창씨개명과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하였다.

▲사법부 독립을 위한 노력

광복 이후 남조선 과도 입법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지낸 그는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과 10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의 완전 결렬로 좌우합작 위원회가 해체되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 기초위원회 위원, 1948년 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으로 활동하며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적극적인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했던 그는 제왕적 대통령을 추구하던 이승만과 잦은 갈등을 빚게 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 관장을 맡아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에는 이를 거부하였고,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에서는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또한 1952년 부산 정치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이후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민정 참여와 군정의 지속을 반대하였고 1963년 민정당 대표 최고 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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