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8일]한국이 낳은 대표적 역사가 ‘단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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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8일]한국이 낳은 대표적 역사가 ‘단재 신채호‘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2.0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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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880년 오늘(음력 11월 7일)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등 역사 논문과 민족 영웅전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단재 신채호' 선생이 출생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규식, 남형우와 함께 ‘신대한’을 발행하고 주필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노선과 행동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일제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과 투쟁 방법을 천명하는 ‘조선혁명 선언’을 집필, 발표하여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을 주장했다.

1928년 외국 위체(환) 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타이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 유가증권 사기 위조 등 행사, 살인 및 사체유기”의 죄목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뇌내출혈로 의식을 잃은 후 타국 땅에서 옥사한다.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

▲민중계몽과 언론 구국운동

신채호는 신숙주의 후예로 부친 신광식이 38세로 사망하자 할아버지 신성우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다. 10세에 ‘자치통감’을 해독하고 ‘행시’를 지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그는 14세때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하여 신동으로 불리었다. 이후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한다.

성균관에 재학하면서 유인식, 김연성, 변영만 등 다양한 인사들과 사귀었으며, 당시 한창이었던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여 격변하는 개화기를 몸소 체험한다. 

1901년 고향으로 돌아온 신채호는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문동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산동 학당’을 개설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이어간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으로 상경하여 황성신문 논설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을사늑약을 폭로 비판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당하자,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기자로 자리를 옮겨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 합병론자에게 고함’ 등과 같은 항일 국권 회복 운동에 관한 논설을 연재하여 민중계몽과 언론 구국운동에 매진한다.

또한 ‘독사신론’을 비롯하여 ‘민족’을 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한 신채호 특유의 민족사관을 정립, 을지문덕 등 역사 속 영웅들의 전기를 집필해 국권 회복과 민족부흥을 도모했다.

▲독립운동과 국사 연구

1910년 신민회가 일부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 기지 건설사업을 담당하도록 결정하자 이에 참여하여 그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그는 1911년 말,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며 교민 통합과 교육 계몽에 크게 기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발해 유적지를 꼼꼼히 조사,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로 이어지는 만주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1914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세용, 윤세복 형제의 초청으로 ‘동창학교’의 국사 교사로 재직했다. ‘동창학교’는 대종교에 깊숙이 관여했던 이들 형제의 영향으로 단군 사상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삼은 교과서를 만들었고, 역사, 국어, 한문, 지리 등을 가르쳤다.

신채호는 이때 ‘조선사’를 집필하여 역사교재로 사용했으며, ‘대동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광개토대왕릉을 비롯하여 만주 일대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나, 미국에 위임 통치를 제안했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사퇴하고 ‘신대한’ 신문을 발행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과 이승만 외교 주의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 선언’을 집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강도 일본이 조선의 국호・정권・생존의 필요조건을 모두 박탈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있음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민족 생존의 적’ 임을 선언하고, 동시에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에 대해서는 ‘혁명’으로 살벌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정당한 수단임을 웅장한 필치로 주장했다.

이 무렵 신채호는 국사 연구상 큰 업적 중 하나인 ‘조선사 상고사 총론’을 완성하여 1931년 6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14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이후 '조선사'와 '조선 상고 문화사'가 같은 신문에 연재됐다.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려면 불필요한 권력에 의한 지배를 없애야 한다는 판단 아래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1927년 9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북경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그는 다양한 ‘선언문’을 작성했고, 1928년에는 아나키즘 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했다. 

1928년 5월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의 선전잡지 발간과 폭탄 제조소의 설치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던 중 타이완에서 외국 위체(환) 위조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다롄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1930년 5월 다롄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으로 이감ㆍ복역하던 중 뇌내출혈로 순국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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