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 11월 30일] 을사늑약 반대한 '민영환'의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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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 11월 30일] 을사늑약 반대한 '민영환'의 자결
  • 장석호 기자
  • 승인 2020.11.3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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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미디어인천신문 장석호기자]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1905년 11월 오늘,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본의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해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이자 척신인 민영환이 자결했다.

▲ 생애

민영환은 1861년 서울시 견지동에서 태어났고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됐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하지만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 

4년 후인 1886년에 이조참의로 제수되면서 다시 정계로 복귀하였고,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 독판내무부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1895년 8월에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부임하지 못한 채 사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때의 민영환(앞줄 왼쪽 세번째)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때의 민영환(앞줄 왼쪽 세번째)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했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했고,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할려다가 수구세력인 민씨일파에게 반감과 미움을 사게되어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參政大臣)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그리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유서 전문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억천만배 더욱 기운내어 힘씀으로써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그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둡고 어둑한 죽음의 늪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

▲ 사후

사망 후에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됐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민영환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에 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됐다.

1994년 서울시 견지동에 자결할 당시 살던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1946년 10월 1일 서울시에서 시호(諡號)인 충정(忠正)을 따서 충정로라는 동명을 제정했다.

▲ 일화

 SBS 다큐멘터리 백만불 미스터리 제작진의 저서인 '하룻밤, 미스터리를 찾아서'에 따르면 민영환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위험에 처한 조선을 걱정하며 자결한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랐다고 전해진다.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고 부른다. 당시 일본에서는 항일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여 혈죽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조사했으며, 민영환의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내려왔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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