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1월 25일]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 타계...6.25전쟁 흥남철수 피난민 구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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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1월 25일]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 타계...6.25전쟁 흥남철수 피난민 구출 영웅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11.25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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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부두에서 미군에게 9만 8천여 명의 피난민 수송을 건의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서 문 대통령 축사 통해 “부모님이 그 날 흥남부두 철수 선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밝혀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현봉학(1922년 6월 23일 ~ 2007년 11월 25일)은 의사 이자 교수이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에서 북한을 탈출하고 싶어 했던 피난민들을 알몬드 미10군단장에게 수송을 건의해 9만 8천여 명을 미군 함에 태워 살려낸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다.

▲ 생애

그는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당시 함경도의 명문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해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버지니아 주도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주립 의과대학에서 유학했으며 2년 후에는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1950년 10월 중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과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와의 통역 문관으로 있다가 알몬드 10군 사령관의 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우트 됐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알몬드에게 북한 주민의 승선을 요청해 9만 8천여 명을 미군 함에 태우게 해 피난민을 구출하는 역할을 했다.

2007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 의사 활동

펜실베이니아 의대 메디칼센터에서 레지던트를 통해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2년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뮐렌버그 메디칼 센터 병리전문의로 1987년까지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또한 버지니아 의대, 콜럼비아 내과. 외과의대, 필라델피아의 토머스 제퍼슨 의과대,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한국의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이에 따라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국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냈다. 이로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도 평가받는다.

흥남 철수 당시 모습
흥남 철수 당시 모습

▲ 흥남 철수, 한국의 쉰들러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3개월,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때 피난민 대열에 섞여들어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

통역관이 된 그는 한국 해병대의 문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부대의 이동에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해 흥남 철수 작전에 관여했다.

이때 알몬드 10군단 사령관에게 북한 주민의 승선을 요청해 9만 8천여 명을 미군 함에 태우게 요청한 일은 뒤늦게 알려지게 됐다. 

1950년 12월 23일 작전당시 흥남부두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 5천 명과 피난민 9만 여명 있어 매우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레디스 빅토리 호
흥남 철수 당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

당시 피난민이 함께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현봉학 박사는 자신이 승선하고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수의 피난민들을 태워 구출해 달라 간곡하게 요청했고 이에 탄복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2천명이 정원인 배에 모두 1만 4천 명이 탈 수 있었다.

피난민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3사단은 후방을 방어하다 세 명이 죽었으며 메러디스빅토리 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이동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으며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하였고 승선한 젊은이들 중 일부는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려고도 하였다.

하루 뒤인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하선시켰다.

이틀간의 철수 과정 중 피난민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선박 구석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틈에서 서로의 웅크린 몸에 의지하며 버텼던 지옥의 시간이었지만 '모세의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다고도 회고한다.

이 철수 작전 이후 현봉학 박사는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리었다. 이때 이틀간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기도 했다.

▲ 업적

현봉학 박사는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으며, 지난 2016년 12월 19일 서울 세브란스 빌딩 1층에서 현봉학 선생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흥남철수 피난민의 가족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축사를 통해 “부모님이 그 날 흥남부두 철수 선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며 현봉학 박사님으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이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며 현봉학 박사의 크신 업적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자고 말했다.

현 박사는 서재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을 기리는 사업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았으며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 단장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저서로는 중공의 한인들(1984), 나에게 은퇴는 없다(1996년),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대탈출(1999) 등이 있다.

1992년에는 한국인 처음 임상병리학 연구로 미국 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인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했고, 1996년 제1회 '연세의학대상'을 받았으며, 2005년 제2회 '서재필 의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위키 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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