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24일]중국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한 ‘백파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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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24일]중국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한 ‘백파 김학규‘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1.2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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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900년 오늘 광복군 제3 지대장으로 항일항쟁의 선봉에 서서 군을 지휘하였고, 광복 이후 중국에 있는 한인들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며 1만 2천 명이 넘는 한인들을 무사히 귀국시킨 ‘백파 김학규’가 출생한 날이다. 

그는 평남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의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 호는 백파(白波)이다.

암살범 안두희를 김구에 소개한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복권되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다.

그는 조선혁명당과 광복군에 입대하여 선전 활동 등을 담당하고 애국 부인회를 조직한 오광심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1967년에 사망했다.

▲구국 항쟁

그는 1910년 대한제국군 고위직 장교였던 이갑을 따라 만주로 건너간 뒤 1919년 서로군정서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1920년 일제의 탄압(경신 토벌)으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만주 봉천 신민현의 문회 고급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운 후 1927년 동명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민족의식 고취 및 항일의식을 심어준다.

1931년 1월 조선혁명당에 가입한 후 군사령부 참모로 봉천성 영릉가 전투와 통화현 전투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혁명군에 모여든 청년들을 규합하여 대부대로 편성했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으나 노선을 달리하는 김원봉과 이청천이 경쟁하게 되자 그는 현익철ㆍ유동열 등과 협의하여 전당 비상 대표자대회를 열어 김원봉과 결별을 선언하고 이청천(지청천)과 함께 새로운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

1940년 충칭에서 광복군이 결성되자, 제3 지대장에 임명되어 대일선전ㆍ모집 공작ㆍ정보수집을 지도하는 한편, 유격전을 전개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미국 OSS와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도모하던 중 광복을 맞으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광복 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상해 판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3만여 명의 한인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데 전력했다. 1946년 9월에는 한국독립당의 만주 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여 한인 1만 2천여 명을 미군 비행기로 수송하여 천진에서 귀국시켰다.

1948년 4월 귀국하여 7월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에 취임했다. 1949년 서북청년단 단원 홍종만의 소개로 안두희를 한국독립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게 소개해 줘 안두희는 별다른 의심을 없이 김구에게 접근하여 암살한다.

이 때문에 김학규는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4ㆍ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허정 과도 정부는 그를 석방하였고, 이후 한국 독립당을 재건하여 최고 대표위원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1967년에 사망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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