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23일] 중국 '북경정변'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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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23일] 중국 '북경정변' 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10.23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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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에 머물던 시절의 선통제
 자금성에 머물던 시절의 선통제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24년 10월 23일은 펑위샹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중화민국 총통 차오쿤을 몰아내고 청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킨 북경정변이 일어난 날이다.

당시 중국에는 위안스카이의 군벌 직예파와 친일 군벌 봉천파, 쑨원의 국민당 등 여러 파벌이 있었다.

직예파 였던 펑위상이 배신해 봉천파로 돌아서면서 중국에는 친일 성향의 정부가 들어섰으며 봉천파와 직예파를 비롯한 군벌 세력들이 중국 북부 일대에서 무력 충돌을 거듭하게 된다.

이후 중국은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북벌을 완수할 때까지 다시 전란에 빠져들었다.

▲ 직예파와 쿠데타 배경

위안스카이의 직계 군벌 그룹인 직예파는 1922년 봉천파를 무찌르고 화북일대를 비롯한 중국 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직예파의 차오쿤은 리위안훙 총통을 몰아낸 후, 의회를 매수해서 1923년에 총통으로 선출됐다.

장쭤린, 돤치루이, 그리고 쑨원이 그를 낙선시키기 위한 반대 공작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오쿤은 총통이 될 수 있었다.

차오쿤의 부하였던 펑위샹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차오쿤과 직예파에 대해 크게 실망하게 됐다.

그는 광저우에서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의 주장에 공감했으며 일본 역시 그가 반일감정이 팽배하던 직예파 차오쿤 정부를 몰아내주기를 바라며 경제적 지원을 했다.

▲ 북경정변

1924년 가을, 직예파는 만주 군벌 장쭤린이 이끄는 봉천파와 충돌했다.

처음에는 직예파 군대가 우세해서 봉천파를 무너트리고 강남 일대의 국민당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방어를 맡고 있던 직예파 펑위샹이 봉천파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10월 23일 이른 새벽 펑위샹의 군대는 봉천파 장쭤린을 치러 가다가 만리장성 인근에서 회군했다.

공모자였던 손악과 호경익이 북경성의 북문을 열고 맞이했으며, 펑위샹의 군대는 신속하게 정부청사 및 공공기관을 점령했다.

펑위샹의 군대가 빠르게 베이징 내외의 교통로를 막았으므로, 차오쿤은 외국 공사관으로 도주하지도 못한 채 총통부에 연금됐다.

▲ 청나라 마지막 황제 폐위

1924년 11월 5일, 펑위샹은 궁정 호군들을 무장해제시고 1912년 만들어진 대청황실우대조건을 일방적으로 수정한 뒤 청나라 황실을 협박해 관철시켰다.

수정된 대청황실우대조건 중에는 선통제의 황제 존호를 영구히 폐지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로서 선통제와 황후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에서 쫓겨나 부친인 순친왕의 저택에 강제로 머물러야 했다.

▲ 펑위샹의 몰락

그러나 펑위샹의 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펑위샹과 장쭤린은 이후 정권 다툼을 벌이며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게 된다.

이후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그리고 쑨원은 교섭을 통해 거국적 화합을 하기로 결정했으나 1925년 3월에 쑨원이 사망하면서 화합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봉천파와 직예파 그리고 펑위샹을 비롯한 군벌 세력들은 이후 중국 북부 일대에서 무력 충돌을 거듭하게 됐다.

펑위샹은 자신의 부대를 국민군으로 개편하고 장쭤린과 싸웠으나 수세에 몰리자 장개석의 국민당에 투항했다.

이후 대세는 장개석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지만 1931년, 일본제국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선통제를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게 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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