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16일] '부마민주항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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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16일] '부마민주항쟁' 발발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10.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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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79년 10월 16일은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독재에 반대한 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시위현장[사진출처=부마항쟁민주화기념재단]
1979년 10월16일 부산대 시위현장[사진출처=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부산에서 10월 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됐고 다음날인 16일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전개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했으며,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된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는 등 강경대응 했다.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결되었다.

▲ 시대적 배경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민주회복'의 기치를 든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후 정국의 경색이 심화된 해였다.

이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 ‘오원춘사건’ ·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여야갈등의 불씨는 커졌다.

8월 11일 YH사건, 9월 8일 김영삼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 10월 4일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사퇴서를 제출했으나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이 제기되며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 민주화 시위의 시작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부마항쟁은 막을 올렸다.

학생들은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구호와 노래, 선언문 낭독 등으로 기세를 올린 학생들은 산발적으로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는데, 주목되는 점은 이날부터의 데모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한 사실이었다.

한편,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됐다.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사실 중 하나는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 등 공권력이었다는 점이다.

▲ 계엄령 선포와 유신의 종료

부마민주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 나가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 각 대학의 당분간 휴교조처와 야간통행금지시간의 2시간 연장 등 8개항을 포고한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 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계엄사령부는 10월 24일 군·검합동반을 편성, 계엄시기 중 조직깡패를 발본키로 특별수사부를 설치, 소탕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됐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 직후 1주일도 안 되어 10·26사건이 발발하자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이했다.

▲ 오늘날의 평가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쌓였던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 등 각 부문에 걸친 여러 모순의 폭발이었으며,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계기이다.

부마민주항쟁은 민주화 운동의 성격, 지도세력 등 여러 평가들이 있으나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함께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현재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제11851호, 2013.6.4. 제정)과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대통령령 제24901호, 2013. 12. 4. 제정)에 따라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인정받는다.

또 2019년 9월 17일에는 부마민주항쟁 발생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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