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6일]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백마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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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6일]6.25 전쟁의 가장 치열한 격전지...‘백마고지 전투’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0.0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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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휴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판문점에서 포로 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1952년 오늘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공격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이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을 격파한 전투로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중공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낸 6.25 전쟁의 치열한 격전지 중 한 곳이다.

백마고지를 탈취한 후 만세를 부르고 있는 백마부대 용사들
백마고지를 탈취한 후 만세를 부르고 있는 백마부대 용사들

▲백마고지(395 고지)

개전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2차례나 38선을 오르내렸다.

당시는 전쟁 지속 능력이 한계에 달한 북한 측의 요청으로 휴전 협상이 계속되었던 시기로 현 접촉 선이 군사 분계선이 될 것에 대비하여 전투는 더욱 격렬해져 현재의 휴전선 일대에서 쌍방 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마고지는 아군에게는 크게 유리한 점은 없었지만, 적군에게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고 수도권 지역 대공세를 위한 공격의 발판을 구축할 수 있는 군사 지정학상 요지였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를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 3개 사단(112 · 113 · 114사단)을 동원하여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에서 3개월간 예행연습 후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공격 전 고지 동쪽의 봉래호를 폭파하고 역곡천을 범람 시켜 국군을 고립ㆍ도살을 계획했다.

공격을 감행한 중공군은 장융후이가 지휘하는 제38군단에 지원부대 병력을 합하여 총병력 4만 4천여 명이었으며,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국군은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제9사단 예하의 제28ㆍ29ㆍ30연대 병력 2만 명에 국군 제51ㆍ52 포병대대, 국군 제53 전차 중대, 미군 제213 자주 포병 대대, 미군 제955중 포병 대대, 미군 제73 전차대대 등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다.

또한 미 제5공군은 주간 669회, 야간 76회 출격하여 네이팜탄 358발을 포함해 폭탄 2700발을 백마고지에 투하했다.

10일 동안의 공방전으로 백마고지는 황폐해졌고 중공군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국군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보아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어 푸르른 산이 하얗게 변한 고지의 모습을 보고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하여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우수한 정보활동과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그리고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 교대를 통해 승리한 국군 제9사단은 ‘상승 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출처: 다음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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