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결성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광복군’ 결성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9.17 13: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1940년 9월 17일 오늘은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1931년 1월 창립) 당군과 기타 독립군, 지청천, 이범석 장군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 등이 연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 국군인 ’한국 광복군’이 성립전례식을 갖고 결성된 날이다.

이후,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해 규모가 확대되고 새로이 개편되었다.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던 사람은 지청천 장군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 장군으로 1944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받다가 1944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했다.

광복군은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고 1946년 대한민국으로 귀국했다.

한국광복군 성 전례식 기념사진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 과정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가운데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광복군 성립 전례식에서의 지청천(총사령관,왼쪽)과 김구(통수권자, 오른쪽)
성립 전례식 지청천(총사령관,왼쪽)과 김구(통수권자, 오른쪽)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1936년에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전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해 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했다.

19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했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졌다.

▲ 창군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해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한다.

광복군 대원들 (1939년 4월 4일)
광복군 대원들 (1939년 4월 4일)

이어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행사가 거행됐다.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약 30여명 정도로 광복군은 총사령부만으로 이뤄진 군인 없는 군대였으나 “1기 임무로 장병을 급속 모집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 항일전선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다.

또, 전선이 가까운 중국 시안으로 이동해 군인 모집에 총력을 기울여 1·2·3지대와 1941년 1월 1일 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한 5지대를 합친 4개 지대로 운영됐다.

1942년 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 있으나 임정에서는 500여명 이상의 대원을 구성, 그 위용을 과시했다.

▲ 활동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1945년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해 통합하는 데에 노력해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고 1942년 7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했다.

이로써 광복군은 지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3개 지대와 제3전구공작대, 제9전구공작대, 토교대를 두게 되었으며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인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 되었다.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했다.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했으나 중국 내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 정진군을 편성했다.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했다가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으나 한국에 진주해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국 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다.

해방 후 귀국한 광복군 모습 (1946년)
해방 후 귀국한 광복군 모습 (1946년)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확군’ 작업에 정진했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1946년 4월 30일 총사령부는 난징에서 해산하고 5월말 이범석 장군의 통솔 아래 귀국했다.

한국 광복군의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으며, 활동한 주요인물로는 이범석 장군과 장춘생 장군, 장준하, 김준엽 등이 소속 돼 활동을 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