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순교....새남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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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9월 16일] '김대건 신부' 순교....새남터 성지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9.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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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새남터(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는 한강의 모래사장으로, 풀과 나무를 의미하는 ‘새나무 터’에서 유래됐다. 1801년 주문모, 1846년 김대건신부 등이 순교한 장소이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백주년 기념으로 성당 건축 공사를 시작해 1987년 순교 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을 건축했다.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순교한 성직자 14명 중 11명이 순교한 ‘한국의 대표적 순교 성지이다.

절두산 천주교 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절두산 천주교 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김대건 신부

김대건(1821년 8월21일~1846년 9월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며,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 이었으며,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대건 안드레아’로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며,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1846년 9월 16일은 새남터 성지에서 김대건신부 등 12명 순교자가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던 날이다.

이들은 목이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 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어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안의 성당에 이장됐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 위치

새남터는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위치해 있어 노들 혹은 음역, 사남기라고 불리었다.

이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됐었다.

이곳은 1456년(세조 2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이 충절의 피를 뿌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 신념에 따른 양심수들이 처형당한 곳이라 할 수 있다.

▲ 순교 역사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외국인 사제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서울 서소문 밖 사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목자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운 조선의 교우들을 위해, 천주교 북경 교구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파견한다. 이 땅에서 맞이한 첫 천주교 사제이자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그의 시체는 닷새 동안 형리들이 지켰으나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1839년 기해박해 때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 자크 샤스탕,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 이들 세 명이 새남터에서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7년 뒤인 병오년(1846년)에는 한국교회 처음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됐다. 그리고 20년 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천주교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 곳이다.

▲기념지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된 뒤 1956년 이곳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독립했고 1987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위키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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