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15일] ‘인천상륙작전‘...6.25 전쟁 전세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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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9월15일] ‘인천상륙작전‘...6.25 전쟁 전세 뒤집어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9.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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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950년 오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국제연합군이 6ㆍ25 전쟁 때 북한군의 후방인 인천에 상륙하여 전세를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암호명-크로마이트 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날 제7 합동 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과 미군과 한국군 등 총병력 7만여 명의 지상군 부대가 상륙 작전에 동원됐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조성하고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 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하여 기세가 오른 우리 국군과 연합군은 평양과 압록강을 점령하게 되었다.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을 포격하는 것을 보고 있다.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에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을 포격하는 것을 보고 있다.

▲6ㆍ25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공산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이 각자의 이념을 중시하며 대립하는 냉전 시대가 도래했다. 또한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동아시아의 미국 방위선은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된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함으로써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배제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인식시켰다. 

상황이 이러할 때 남한 이승만 정권은 1948년 제주 4ㆍ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으로 사회가 혼란했고 어려운 경제난으로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해 1950년 5ㆍ30 총선거에서 210석 중 30석을 차지하는 데 그쳐 정국 불안이 계속되었다.

반면 북한 김일성은 소련 스탈린과 중국 마오쩌둥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북한은 남침 계획을 세우고 남한에 훈련된 게릴라를 파견하는 한편, 소련으로부터 비행기와 탱크 등 무기를 지원받았으며, 1949년 중국이 중공군에 참여했던 북한군 5만 명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여기에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자 김일성은 소련과 남침에 대한 의견을 같이하고, 5월에 중국을 방문해 이를 통고하고 결국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은 발발했다.

미처 전시 체제를 갖추지 못한 한국군은 완벽한 전력을 갖춘 북한군에게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두 달 뒤에는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인천 상륙 작전

북한군은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된다.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할 때는 적이 보여 유리하지만, 반격하려면 도강을 해야 하므로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적에게 노출되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시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 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단숨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예측해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보급을 위해 사용한 육상 교통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서울을 통과했기 때문에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본부는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크고 수로가 좁고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반대가 많았고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을 권했으나, 적의 보급선과 적의 병력에 타격을 줄 수 없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을 적 후방의 완전 단절과 적의 방어 병력이 매우 적을 것이라는 명분으로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된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뿐이었는데 10월은 기후 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여서 가장 적합한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당시 북한군은 월미도에 제226 독립 육전 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 해안포 연대가 인천 해안을 방어하고 있었고,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작전은 약 열흘 동안 3단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단계는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을 시작하여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점령했다. 

2단계는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이 진격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하였고, 3단계는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은 끝났다.

상륙작전 개시 후 약 보름 만에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남을 모두 회복했으며, 북한군은 약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북으로 도주한 자는 3만 명이 채 안 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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