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9월1일]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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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9월1일]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9.01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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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923년 오늘 오전 11시 58분 일본 도쿄(東京) 일대의 관동(關東) 지방에 진도 7.9의 초 강진이 발생하여 14만여 명이 희생되고 가옥 57만 채가 완전히 부서지거나 소실됐다.

지진은 5분 간격으로 세 차례 발생했으며, 이틀 동안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무려 15번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부분의 집이 화기를 사용하고 있던 점심시간에 발생한 지진으로 많은 화재가 생겼고, 전날인 8월 31일 규슈 지방에 상륙한 태풍의 영향으로 거센 강풍까지 불어 목조 건물들은 순식간에 화재에 휩싸였고 교통과 통신은 끊기고 도쿄 밤 기온은 46도까지 오를 정도였다.

당시 일본은 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한국ㆍ중국의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탄압 기회로 삼아 대학살을 자행했다.

관동 대지진 당시 아사쿠사 센소지 주변
관동 대지진 당시 아사쿠사 센소지 주변

▲관동 대지진

당시 지진은 대규모의 화재와 해일, 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의 60%, 요코하마의 80%를 파괴했다.

이로 인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는 동일본 대지진의 6배, 고베 대지진의 16배이며, 피해액은 지진 발생 전년도 국민 총생산액의 1/3에 이르렀다.

또한 수많은 인파가 피난한 도쿄 혼조 육군 피복창 광장에서는 세찬 바람 때문에 불씨가 피난 보따리에 옮겨 붙어 4만 명이 타 죽었다. 

당시 총리였던 가토 도모 사부로가 지진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암으로 사망하고 우치다 고사이 외상이 총리직을 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진 이후 복구 과정에 혼란이 많았다.

지진 직후 참모본부에서는 천도를 검토했으나, 지진 발생 11일 후 발령된 조서에 따라 도쿄를 계속 수도로 삼기로 한 이후 복구 과정에서 현대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었다.

▲관동 대학살

1920년대 전반 일본은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여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ㆍ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안으로는 노동자 계급의 성장, 쌀 소동, 일본 공산당의 성립에 따른 계급투쟁의 격화로 사회는 혼란했다.

관동 대학살
관동 대학살

일본의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던 중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에 빠지자,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해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할 기회로 삼는다.

이에 일제는 한국인 폭동의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도쿄ㆍ가나가와 현ㆍ사이타마 현ㆍ지바 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혼란의 와중에서 군대ㆍ경찰ㆍ자경단에 의해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등이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희생자 수는 6,661명(공식 기록)에서 23,058명(독일 외무성 자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약 6,000명가량의 한국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대ㆍ관헌의 만행을 숨기고 자경단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재판에 회부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석방했다. 

해방 후 이승만은 언젠가 있을 일본과의 식민지 배상 문제를 위해 학살 상황을 조사했지만 단교된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이때 조사한 기록이 학살당한 한국인 290명의 명부와 함께 2013년 11월에 발견되었다. 

▲유언비어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를 정점으로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 등이 유언비어를 생산 · 전파 · 확대하였다. 그 증거로 유언비어가 제일 먼저 경찰에서 유포되기 시작했다는 점과 표적이 조선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유언비어가 계엄의 선결 조건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들이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호황을 누리던 일본은 노동자 부족으로 조선에서 노동자를 모집해 관동지역에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다.

또한 조선인들은 학력도 보잘것없고, 천박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온순하기까지 해 희생양으로 적격이었고, 1919년 9월 강우규 의사의 폭탄 사건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미즈노의 개인적인 원한과 조선에서 격렬히 일고 있던 독립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5일에는 계엄 사령부에 의해 ‘조선 문제에 관한 협정’이라는 것이 극비리에 결정하면서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는 데 노력했다.

그들의 ‘작전’은 기정 사실화돼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했으며, 조선인을 많이 죽일수록 계엄령의 명분이 축적되고, 정부를 향한 불만을 차단할 수 있었다.

 

*출처: 다음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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