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7일] 황실 후손 '이우'...히로시마 피폭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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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7일] 황실 후손 '이우'...히로시마 피폭 사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8.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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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영군 이우
              흥영군 이우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45년 8월 7일은 대한제국 황실 후손인 이우가 히로시마 피폭으로 사망한 날이다.

이우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이며 자신의 당숙인 이준용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됐다.

운현궁을 상속한 후에는 공위를 세습 받아 ‘이우공 전하’라는 공족의 칭호를 사용하게 됐으며, 사망 이후에는 사시인 흥영군에 추봉된다.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 논란이 있었으나 일본인과의 결혼을 거부하는 등 미약하게나마 식민통치에 저항한 인물이다.

▲ 출생과 운현궁 승계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동궁에서 출생했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이었던 수인당 김흥인이다.

1917년 5월 28일 그는 당숙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돼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게 된다.

이준용은 자녀로 소실 전순혁에게서 얻은 서녀 이진완만이 있었고 남자 상속자가 없어 고종의 뜻에 따라 이우가 양자로 지목됐다.

같은 해 5월 28일에는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천황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됐다.

8월 4일에는 재산 관리와 보육의 후견인으로 이준공비 광산 김씨와 이왕직 장관이 선임된다.

이준용은 1912년에 사망한 아버지 이재면의 뒤를 이어 ‘공’의 지위를 갖고 있었고, 이우는 공위를 세습 받아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의 경칭을 받았다.

▲ 성장기의 이우

1915년 이우는 경성유치원에 입학하고 1918년 3월 28일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9년에는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7월에는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조선 일시귀국을 앞두고 오사카의 조선인들이 이우를 둘러싸고 일을 모의한다는 소문이 돌아 경찰이 조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 4월 26일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로 임명됐고,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직을 수행한다.

당시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도록 강제됐다.

학습원 중등과를 졸업한 이우는 1926년 4월에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 1929년 3월 18일에 졸업했다.

▲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거부

일본인과의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친왕과 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의 딸 박찬주와 1935년에 결혼했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했다.

궁내성에서는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쓰구의 딸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는데, 야나기사와는 이우의 이복형 이건의 장인인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와 동서지간이다.

그러나 의친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이를 거부했다. 의친왕은 친분이 있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를 배우자로 점 찍었다.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과 일본 황실에 혼약이 성립됐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당연히 혼약을 깨라는 압박이 있었으나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 사망과 오늘날의 평가

194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난 이우는 며칠 후 새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했다.

이우는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에 근무했으며, 8월 6일 출근 도중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됐다.

이우는 그날 오후 혼가와 아이오이 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됐다. 그는 히로시마 남단 니노시마 섬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다음날 새벽 고열로 신음하다 사망했다.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는 생전의 이우에 대해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 만큼 싫어한데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우는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친일 논란이 있었고, 한때 일본 정부에 의해 야스쿠니 신사 합사가 추진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명단에서 제외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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