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5일] 미국선교사 ‘호머 헐버트’ 사망...한국독립운동 지원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8월5일] 미국선교사 ‘호머 헐버트’ 사망...한국독립운동 지원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8.05 1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호머 베절릴 헐버트(1863년 1월 26일 ~ 1949년 8월 5일)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목사로 육영공원 교수로 근무하며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인 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한 노력으로 195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에 추서됐다.

호머 할버트
호머 할버트

▲ 업적

그는 대한제국에서 감리교 선교사, 목사, 교육자, 항일운동가로 활약하고,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했다. 그 시절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이후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외국인으로 고종황제의 특사를 세 번이나 받았다.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1907년에는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과 참여해 밀사 활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고,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배델(영국 출신)과 아울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고 있다. 또한, 그는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 생애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국 버몬트 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칼빈 헐버트 목사였다.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엘리저 윌록의 외증손녀인 메리 우드워드로 그녀의 아버지는 인도에 파송된 선교사였다. 1884년, 할버트는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받고 그 해에 유니언 신학교에 들어가서 2년간 수학을 했다.

1886년(조선 고종 23년)에 길모어, 벙커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육영공원에서 근무하면서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을 가르쳤다.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호머 헐버트가 집필한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1891년 최초의 순 한글 지리사회 총서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는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고, ‘사민필지’ 서문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한자만을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긴다는 기록을 했다.

육영공원에서 교직으로 근무시절 헐버트는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채보했다.

▲ 한국독립운동 지원

1890년 일본제국으로부터 조선의 위협을 알게 된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 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다. 이후, 조선의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다. 그는 고종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1903년부터 타임스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으며, 1904년에는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을 지냈다. 그는 러일전쟁을 깊이 있게 취재하여 송고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 사건이 있은 후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했다. 또한,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주요 역할을 했다.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했으나 일본 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 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 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해 활동에 힘을 보태고, ‘한국의 분리 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고, 한국의 분리 독립성을 호소하였다.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았다. 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 제국의 침략에 규탄하였고 한국의 분리 독립에 관한 글을 썼다.

1918년에는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였다. 1942년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44년 그는 '한국문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양화진 헐버트의 묘
양화진 헐버트의 묘

▲ 말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는 독립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42년 만에 방한하였다. 방한 이후 1주일 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그에게는 두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첫번째는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이고 두번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이었다.

▲ 사후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 저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그리피스의 ‘Hermit Kingdom(은자의 나라 조선)’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나라들)’등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이에 그는 2014년 10월 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할버트는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와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을 편찬해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891 사민필지

1892~98 The Korean Repository / 간행물 한국소식(혹은 한국휘보)

1901~06 The Korean Review / 간행물 한국평론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글 모음)

1907 The Japanese in Korea: Extracts from the Korea Review

1903 Sign of the Jumna / 줌나의 기적

1903 대동기년

1903 Search for a Siberian Klondike

1905 The History of Korea / 한국사, 드라마가 되다

1905 Comparative Grammar of Korean and Dravidian

1906 The Passing of Korea / 대한제국멸망사

1925 Omjee - The Wizard / 마법사 엄지

1926 The Face in the Mist / 안개 속의 얼굴

1928 The Mummy Bride / 미라신부

*출처: 위키백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