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 16일] ‘인류 최초 핵폭탄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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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 16일] ‘인류 최초 핵폭탄 실험'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7.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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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1945년 7월 16일 오늘 미국은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의 폭격연습장에서 ‘가제트(gadget)’란 이름의 폭탄을 이용, 인류 최초 핵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을 계기로 리틀보이(포신형)와 팻맨(내폭형)이라는 핵폭탄을 만들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를, 9일에는 나가사키에 팻맨을 투하해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 맨하튼 계획

최초의 핵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으로 생긴 버섯구름
최초의 핵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으로 생긴 버섯구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했던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이다.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육군 공병대의 관할로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됐다.

민관 합동으로 진행된 맨해튼 계획의 군사 부문은 맨해튼 지구라고 불렸고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공식 이름은 대체 자원 개발(Development of Substitute Materials)이었다.

참여한 학자들만 보더라도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등 20세기 물리학 올스타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라늄의 유통을 중단하면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하고 있다고 판단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이 작전을 허가한다.

이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이 프로젝트를 보고받고 최대한 빨리 핵폭탄 개발을 완료할 것을 촉구하고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예산이 무한정 지원됐다.

맨해튼 계획은 핵무기 제조가 최대 목표이긴 했으나 방사능의 의학적인 이용, 핵추진력을 이용한 해군력 확보와 같은 방사선학의 다양한 적용에도 관심을 두고 있어 1947년 이후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로 업무가 이관됐다.

▲ 트리니티 실험 결과

실험용 폭탄 '가제트'가 최종 조립 중 모습
실험용 폭탄 '가제트'가 최종 조립 중 모습

맨하튼 계획의 실제 책임자인 그로브스는 임계직전까지 핵분열을 통제하는 불완전 핵폭발 시험을 구상했으나 총책임자인 오펜하이머는 총체적인 핵실험을 선택했다.

1944년 3월 하버드의 물리학 교수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내폭형 핵폭탄의 실험을 기획하고 베인브리지는 실험장소로 알라모고르도 폭격연습장을 선정했다.

1945년 7월 13일 가제트로 불린 실험용 폭탄이 30m 높이의 철탑에 설치되고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부시, 차드위크, 코난트, 파렐, 페르미, 그로브스, 로렌스, 오펜하이머, 톨만 등 맨해튼 계획의 주요 인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초의 핵폭발이 일어났다.

20킬로톤의 TNT와 맞먹는 수준의 폭발이 일어나 직경 76m의 크레이터를 만들었고 충격파는 반경 160Km에 달했다.

크레이터 안에는 고열로 인해 지표가 유리질로 변형되어 이 유리질은 '트리니타이트'라 불리게 됐다.

▲ 일본에 핵폭탄 첫 사용

나가사키 상공에서 팻맨의 폭발모습(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상공에서 팻맨의 폭발모습(1945년 8월9일)

1945년 8월 6일 폴 티베츠는 제393 폭격대 소속 B-29 에놀라 게이를 이용 '리틀보이'를 탑재하고 출격한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가 폭발하자 530m에 달하는 구름 기둥이 솟아오르고 폭발력은 13킬로톤의 TNT에 상응하고 12Km 지역이 완전히 파괴되고 약 7~8만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도 약 7만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9일 아침 B-29에 찰스 W. 스위니 소령이 팻맨(내폭형)을 탑재하고 이륙해 첫번째 목표인 고쿠라로 향했지만 구름 낀 날씨 때문에 시계가 좋지 않아 대체 폭격지인 나가사키에 팻맨을 투하한다.

폭발력은 21킬로톤의 TNT와 상응했고 나가사키는 전체 시 면적의 약 44%가 파괴됐다. 폭발 당시 사망자는 3만5천여명이었고 6만여명이 부상 당했다.

그로브스는 제3의 폭탄을 8월 19일 투하하기로 계획하고 추가로 2기의 팻맨을 조립 완료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실제 폭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관리는 “만일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항복의 이유를 찾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했어야만 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폭격이 반드시 필요했는지에 대해선 역사학자 사이에 논란이 일고 있었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원폭은 도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전혀 정당하지 않으며 전후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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