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3일] '피켓의 돌격'...미국 남북전쟁 승패의 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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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3일] '피켓의 돌격'...미국 남북전쟁 승패의 분수령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7.0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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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의 최고 지휘관 북군의 조지 미드(왼쪽) 남군의 로버트 리(오른쪽)
게티즈버그 전투의 최고 지휘관 북군의 조지 미드(왼쪽)와 남군의 로버트 리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63년 7월 3일은 이른바 ‘피켓의 돌격’으로 인해 미국 남북전쟁의 승패가 북군의 승리로 사실상 결정된 날이다. 

피켓의 돌격은 게티즈버그 전투 개시 3일째 되는 날 로버트 리 장군의 남부군이 북군 진영이 위치한 묘지능선을 향해 돌격한 사건을 말한다. 

이 공격은 약1.2㎞의 평야를 달려 능선에 자리 잡은 북군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도 피켓의 돌격은 남부의 상승세를 꺾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오늘날 평가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표현이 바로 이 게티즈버그 전투 전몰용사를 위한 추모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남북전쟁 초기의 전세 

노예해방을 둘러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내전으로 치달았던 사건이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 주들은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1년 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미국은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내전 초기 남군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차지했다. 이는 적지 않은 병력손실을 감수하며 과감한 공격을 주도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공이 컸다. 

1863년 6월, 남군은 이러한 여세를 몰아 북군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에워싸며 북쪽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전선을 북쪽으로 옮기면서 필라델피아나 볼티모어, 그리고 워싱턴과 같은 북부의 주요 도시를 위협하고 남부의 독립을 허용하는 평화협정을 얻어낸다는 계획이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개시

북군은 워싱턴 앞을 흐르는 포토맥 강을 등지고 남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6월 29일 북상하던 남군이 방향을 틀어 워싱턴 쪽으로 남하하자 북군 또한 이를 막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난 곳은 워싱턴에서 90㎞ 서북쪽에 위치한 게티즈버그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에서 16만여 명의 남군과 북군이 결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6월 30일, 남군이 게티즈버그를 향해 진군하는 사이 이곳에 먼저 도착한 것은 뷰퍼드 장군이 이끄는 북군의 기병대였다. 

남군이 게티즈버그 북쪽과 서쪽에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간파한 그는 마을 북쪽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7월 1일 새벽, 게티즈버그로 진군하던 남군은 뷰퍼드의 기병대와 만나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용호상박의 전투와 전세역전

이날 전투에 참여한 남북 병력 수는 약 5만여 명에 이른다. 북쪽과 서쪽 능선을 장악한 북군이 전술적으로는 유리했지만 사기충천한 남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후부터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북군은 마을 남쪽의 언덕과 능선으로 후퇴해 낚싯바늘 모양의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후 이틀간의 전투는 이 언덕과 능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벽을 설치한 북군에 대한 남군의 처절한 공격이 계속됐다. 

북군은 언덕 고지에 방어벽을 설치하고 아래에서 달려오는 남군을 향해 총탄과 포탄을 퍼부었다. 

총알이 떨어진 북군의 한 연대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총검 공격을 감행해 남군을 막아내기도 했다.

▲피켓의 돌격 작전 실패

게티즈버그 전투 중 이틀 동안 리틀 라운드 탑과 빅 라운드 탑 언덕을 빼앗기고 초조해진 리 장군은 주변의 반대에도 작전을 실행했다. 

오후 1시경부터 포격전이 시작되고, 4시경 포격전이 끝난 후 조지 피켓 휘하의 보병 1만2500명이 약12km를 달려 묘지능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빗발치는 총격을 뚫고 묘지 능선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전군이 전멸하였다.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 결과적으로 리는 펜실베이니아 공격과 워싱턴 D.C. 고립 작전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남북전쟁 최고의 전략가로 알려진 리 장군은 명성에 큰 흠집을 입고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 연합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보냈으나 반려됐다.

또한 많은 병력을 잃은 남군은 이때부터 내리막길을 걷는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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