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26일] '백범 김구'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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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26일] '백범 김구' 암살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6.26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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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백범 김구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49년 6월 26일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우익 정치의 거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이 살해당한 날이다.

이날 낮 12시 36분 김구는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했고,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4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명동성모병원 원장 박병래는 정모 수녀 등 몇몇 간호수녀들을 대동하고 경교장으로 찾아가 천주교 예식대로 세례를 주었고, 김구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이전에 성모병원 입원 당시 수녀들의 권고로 언제든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언약한 바 있다.

암살의 배후는 안두희가 한국전쟁 이후 사면을 받고 군납업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권력층의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만 될 뿐, 오늘날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생애와 독립운동

1876년 8월 29일 태어난 김구는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인물이다.

구 안동 김씨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한 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한 적도 있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했다.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도 그가 주도했다.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을 비롯,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했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한독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석상에서는 남북협상에 대해 일부 인사들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피력하면서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했다.

▲암살 정황

김구가 암살 음모에 대한 제보를 받은 것은 사망하던 해 3월의 일이다. 하지만 일본인도 살해하지 못한 자신에게 동포가 어떻게 위해를 가하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안두희는 암살 당일 김창룡의 지령을 받고 경교장에 찾아가 권총으로 김구를 저격했으며, 특무대에 연행됐다.

공판기에 의하면 김학규는 홍종만을 통해 안두희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김학규와 만나기 전부터 홍종만을 통해 한독당에 입당할 것을 종용했다.

김학규는 안두희와 만날 때마다 대한민국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는데,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김학규는 경교장에 모인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줬다.

그가 갖고 있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묻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했다.

▲배후와 의문점

그러나 막상 이승만 정권에는 김학규가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가 흘러들어갔고, 김학규는 오히려 정부의 추적을 피해 숨게 된다.

일설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소령, 김병삼 대위, 김태선 서울시 경찰국장, 김성주 서북청년단 부단장, 정치브로커 김지웅 등이 가담하고, 홍종만, 안두희 등이 하수인이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한때 김구 암살은 백의사의 소행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정병준 박사,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는 안두희가 미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정식 요원이었으며, 우익청년 단체 백의사 특공대원 활동 사실을 미 국립공문서 보존기록관리청 문서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백의사 단원이자 백관옥의 동생인 백찬옥에 의하면 염동진은 백범 김구의 암살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뉴욕 타임즈는 한국 '정부고위소식통'을 인용, 김구의 죽음은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 했던 군사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결과라고 보도했다.

▲관련자들의 운명과 사후의 김구

암살자인 안두희는 재판에 회부된 지 석 달 뒤 15년으로 감형됐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가 1953년 2월 15일 완전 복권됐다.

김구의 장례는 국장이 결정됐으나 한독당 측에서는 민족장을 고집했다. 정부에서 이범석과 신성모, 허정 등을 경교장에 파견하자 조완구, 조소앙 등은 너희가 죽여놓고 너희가 국장을 하느냐며 흥분했고 실랑이와 몸싸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측이 보낸 사절단과 한독당 인사 간에 마찰이 빚어졌고, 김규식의 중재로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이 결정됐으며, 김구의 국민장은 10일간 거행된다.

같은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된 김구는 이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에 의한 암살의혹이 제기된 것은 1960년대의 일로 김창숙 등에 의해 백범 김구 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돼 암살범 안두희의 출국을 막고 시해 진상규명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다.

1963년 서울특별시 남산에 동상이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조국통일상이 추서됐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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