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06월19일] 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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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06월19일] 대마도 정벌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6.19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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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들의 약탈을 그린 회화 (16세기)
왜구들의 약탈을 그린 회화 (16세기)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419년 6월 19일은 조선이 일본 대마도를 정벌한 날이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오늘날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이다.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대마도는 고려말과 조선초기 전ㆍ후로 왜구가 들끓는 거점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다.

조선 왕실이 들어선 후 조정에서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고 세종 1년인 1419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의 명으로 정벌이 이뤄진다.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는 총지휘관으로서 병선 227척, 병사 1만7285명과 함께 토벌에 나섰으나 싸움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화친에 합의하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 정벌

조선 세종 1년 5월, 조선의 충청도 비인현에 왜구가 출몰해 정박 중이던 조선측 병선을 불사르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조선 땅에 상륙해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했다. 며칠 뒤에는 황해도 해주 연평곶으로 와서 조선 수군에 중국으로 가는데 필요한 식량을 대어 달라며 쌀을 가져온 인부들을 억류한다.

상왕 태종은 같은 해 6월 왜구 진압을 명분으로 내걸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됐다. 이때의 쓰시마 공격을 한국측에서는 기해동정, 일본측에서는 오에이의 외구라고 부르고 있다.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은 오사키우라를 불사르고 이어 오후나고시를 쳤으며, 누카다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현지 지형에 밝았던 복병의 반격으로 대패했고, 180명의 병사가 죽었다. 일본측도 폭풍우로 더 이상의 전투가 어려워지자 조선측에 화평을 제안했다.

정벌 이후 관계

한편 조선 태종이 승하한 뒤 세종은 일본에 대한 선린정책을 행했고, 세 번에 걸쳐 통신사를 보내 통교 제도를 정비했다.

1438년 대마도에서는 문인제를 채용하고 1443년에는 계해약조라 불리는 양국간 협약이 체결됐다.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오는 세견선은 해마다 50척을 상한으로 하는 대신 조선측이 해마다 세사미라는 이름으로 도주에게 2백 섬씩의 쌀을 지급하기로 결정됐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자는 쓰시마 소 씨의 통제 아래 두게 했으며, 남부 해역에서의 고기잡이 특권도 소 씨에게 일부 허용하게 된다.

이 무렵 대마도의 상황은 당시 통신사로써 일본을 방문했던 인물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왜구의 거점 지역 대마도는...

대마도는 예로부터 유라시아 대륙과 일본열도의 문물이 오가는 창구였고, 일본 역사에서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적, 경제적인 창구 역할을 맡아왔던 지역이다.

원나라의 일본원정 이후 고려 말기 중국과 한반도 해안에는 왜구라 불리는 일본발 해적들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대마도는 이키나 섬, 마쓰라 섬과 함께 왜구의 근거지인 '삼도'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다.

왜구가 창궐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남북조 시대가 열리고 남조와 북조 세력이 충돌하던 규슈 지역에서 발생한 지휘 계통의 혼선이 흔히 지목된다.

대마도의 도주인 쓰시마 소 가문은 병량 확보를 위한 외부로의 약탈을 명했으며, 이것이 왜구 창궐의 시발점이 된 이른바 '경인년(1350년) 왜구'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1366년 고려는 소 가문에 왜구 박멸을 요청했고, 소 쓰네시게가 이에 응해서 고려와의 통교가 시작됐다.

하지만 왜구는 그 뒤로도 여전히 창궐했고, 왜구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명망을 얻게 된 신흥 무인 세력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우게 되는 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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