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 4일] 중국 ‘천안문 사태’...."피의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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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 4일] 중국 ‘천안문 사태’...."피의 일요일"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6.04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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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또는 ‘제3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날로 중국의 정치가인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천안문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전개한 반정부 시위를 중국 정권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라 지칭하는 반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과 서방세계에서는 ‘톈안먼 광장 저항시위’ 또는 ‘톈안먼 광장 도살’, ‘89년 민주운동’이라고 칭한다.

중국의 검색엔진에서 ‘톈안먼 사건’을 검색하면 접속이 안 되고 5월 35일(5월 31일+4일), VIIV(로마숫자 64), 82(64=6월 4일) 등의 은어로 검색되고 있다.

이 사건에 중국 정부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명, 부상자 7천여명이 발생한 사건으로 발표했으나 국제적십자협회 등에서는 사망자가 2600여명으로 발표했다.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중국 공안부가 정식 발표한 것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과 부상자는 약 1만 4550명이고 군인과 전경은 56명 사망에 752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 배경

'천안문 사태' 20주년 기념행사 조각상
'천안문 사태' 20주년 기념행사 조각상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내 자신의 지지세력인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보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했고 그중 후야오방은 1989년 1월 베이징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대와 공안의 충돌한 사건에 책임을 물어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자오쯔양이 당 총서기가 됐고 후야오방은 중국 공산당 중앙 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심장병 발작으로 쓰러져 4월 15일 세상을 떠난다.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해임됐던 그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해달라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4월 17일부터 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위를 계속 벌여 참가자 수는 계속 늘어나 4월 22일 장례식을 계기로 시안 등지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5월 20일 부분적으로 계엄령을 발표하고 6월 3일 저녁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톈안먼 일대에서 중국 군대, 전경과 시위대가 충돌한 뒤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반관료, 반부패 시위 확대가 후야오방의 사망으로 발단이 됐으나 과거의 공산주의 경제 체제에 급변이 진행됐고 민족 분규가 잦아지는 등의 난국에서 과감한 경제 개혁으로 개방의 폭을 넓혀온 중국 개혁개방파는 시장가격제를 급작스레 도입하고 국영근로자의 양로복지를 감축하는 ‘쌍궤제’ 정책을 실시해 하위 간부들의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물가 상승과 분배의 불평등, 사회적 불평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단위 체제와 산업 수요가 변화한 상태에 실업 위기를 직면하게 된 대학생, 근로자, 농민공과 문화 대혁명 관련자 등과 석방된 정치범, 사회 불만세력들이 시위의 수위를 높여나가자 중국 정부는 강경 진압 결정을 내렸다.

▲ 과정

20주년 기념행사
'천안문 사태' 20주년 기념행사

4월 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한 후 팡리즈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난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하고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 국가주석과 리펑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천안문 광장
천안문 광장

이후 6월 4일 새벽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키고 시내 곳곳에 있던 수천 명의 시민 ·학생 ·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 당했다.

이 유혈사태로 중·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은 즉각 전세계로 보도를 실시해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나라 등에선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와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냈다.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과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다.

 

*출처: 위키백과 / 두산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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