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6월 3일] 한일협상 반대 운동 ‘6·3 항쟁’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 6월 3일] 한일협상 반대 운동 ‘6·3 항쟁’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6.04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6·3 항쟁 또는 6·3 시위는 한일협상 반대 운동으로 1964년 6월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해 일으킨 운동이었다. 1964년 박정희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6월 3일 저녁 10시에 선포한 계엄은 7월 29일 해지되었다.

6.3 시위를 독려하던 윤보선
6.3 시위를 독려하던 윤보선

▲ 원인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조속타결하려는 움직임이 1964년 벽두부터 표면화되었다. 곧 도쿄에서 정치협상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월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 했다. 1964년 2월 22일 민정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을 발표했다. 박 정권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했다. 3월 6일 민정당, 민주당, 자민당, 국민의당 등 재야의 모든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으며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은 윤보선이 맞아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며 한·일 합방은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고 비판했다.

▲ 시위 결과

서울 시내의 각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 들이 가두로 진출해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 6월초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6월 3일 정오,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 2,000여명의 학생들은 도처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윤보선은 이를 마치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고 묘사하였다. 대학생 7~8,000여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다. 중앙청 앞의 바리케이트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놓았다. 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밤 9시 40분에 선포하기로 한 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하여 서울시 전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일기본조약은 통과됐다.

▲ 정치인들의 대응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에 의해 주도되는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지원, 고무, 독려했다.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시위 금지와 진압, 언론검열, 대학휴교등 주동자 검거에 돌입했다. 이 조치로 시위의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천120여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던 이명박은 이명백으로 이름이 잘못 알려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까지 경찰이 침투하고 수사망이 좁혀 오자 스스로 자수하게 된다.

이후 박정희는 방송담화를 통해 6.3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이며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보선은 "난국의 타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철학이 요구된다며 정국혼란이 일부의 정치인, 언론, 학생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박정희씨는 판단능력이 흐리고 정치철학이 없었던 것일까 그의 발언은 대다수 식자층을 비롯한 애국 국민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고 반박하였다.

6월 6일 계엄령이 선포한지 3일 뒤, 무장군인들이 심야에 학생들에게 호의적이던 동아일보사에 침입해 위협 공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친 민주당, 친 신민당계 언론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탄압이며 나아가 언론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독재의 극치'라고 비난하였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시위는 진압되었고 이튿날인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출처: 위키 백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