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9일]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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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9일]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6.09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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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894년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내무총장과 제헌 국회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신익희가 출생한 날이다.

그는 이시영, 조소앙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 선임되어, 이들과 함께 성안 된 한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임시헌장이 선포되었다.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고,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 자주성을 고취하기 위해 자유신문을 발행했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호남 유세차 호남행 열차로 전주로 가던 중 5월 5일 열차 안에서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대한민국 건국장을 추서 했다.

35세 때 신익희

 

독립운동의 뜻을 세우다

그는 1908년 발전한 서구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것임을 깨닫고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수학 후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한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그는 임규ㆍ송진우ㆍ최남선ㆍ정노식 등과 국내 독립운동을 밀의하고, 해외 독립 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또한 그는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만주지방을 가 김좌진 장군을 만났다.

평양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그는 제자인 강기덕ㆍ한창환과 함께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 만세시위를 남대문 역 앞에서 대규모로 추진하여 3월 3일 고종의 인산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1 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제1회 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에 피선되고 이시영, 조소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 위촉받았다.

또한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서리와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하고 국무원 제1호 지방 조직체인 연통제를 공포 실시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이에 각각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 협동 전선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한국혁명당의 대표였던 신익희는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ㆍ조선혁명당ㆍ의열단ㆍ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한국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은 대일전선의 확대 및 강화를 도모하고,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 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은 한계가 있었다. 

1944년 임시 정부의 연립내각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었고, 1945년 내무부장의 자격으로 환국해 정치 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반공전선에 나섰다.

이후 남조선과도 입법위원에 당선되어 한국의 헌법과 건국에 필요한 법률 제정에 기여했다.

그는 3선 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가던 중 권력 연장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에게 반대하여, 1955년 장면ㆍ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1956년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감하였으나, 유세를 위해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사망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185만여의 추모 표가 기표되었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출처: 다음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두산백과 /신익희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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