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5월 27일]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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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5월 27일]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순국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5.27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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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독립운동가 박재혁(1895년 5월 17일 ~ 1921년 5월 27일)이 태어났다.

부산태생인 그는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폭사시키는 의거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단식 중 옥사 순국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생애

1895년 5월 17일 조선 경상도 동래군 동면 범일동리(현재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해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와 부산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고 전신, 현 부산 개성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반일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 오택 등과 함께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등사해 배포하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했다.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동상
독립운동가 박재혁 의사 동상

졸업 후 그는 경상북도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에서 창단된 의열단은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시키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은 의열단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에 대한 폭탄과 군자금을 건네주며 박재혁에게 의거를 권유하였다.

부산경찰서 폭탄투척 

1920년 9월 14일, 고서를 파는 중국인으로 가장한 그는 고서에 관심이 많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해이에게 접근했다. 

하시모토 서장의 면회 승낙으로 경찰서를 찾은 그는 폭탄을 꺼내고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 단원이다.너희가 이미 우리들한테 몹쓸 짓을 한 것을 알고 왔다!”라고 말하며 하시모토의 죄를 열거한 후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고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고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말고 차라리 내손으로 죽겠다." 고 결심한 뒤 단식하다가 옥사 순국했다. 한편, 중상을 입은 경찰서장 하시모토도 숨졌다.

정부에서는 1962년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했으며, 2012년 7월 14일 부산 동구청에서는 그의 생가가 있는 조방로 630m 구간을 ‘박재혁 거리’로 명명했다.

 

*출처: 위키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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