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5월15일] 세종대왕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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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5월15일] 세종대왕 탄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5.15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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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397년 5월 15일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이다.

세종대왕의 아명은 막동(莫同)이었으며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의 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이다.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됐으며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했다.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正音)을 창제했다.

오늘날까지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5월 15일은 스승의 날로 지정돼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셋째 왕자, 왕위에 오르다

한성 준수방(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고을에서 태어난 세종대왕은 태종 8년인140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4년 후 둘째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했다.

1418년 태종은 신하들과의 회의에서 “세자(양녕대군)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면서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했다.

충녕대군은 처음에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해 8월 초8일 태종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연화방의 옛 세자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즉위 직후인 1418년 9월에서 1422년 5월까지는 부왕인 태종이 태상왕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했다. 친정이 시작된 것은 1422년 5월부터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과 그 영향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된다.

그는 문자를 만들기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 찬을 만나려 했으나, 명나라 조정에서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은 성균관 주부 성삼문,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사용 손수산이 요동에 귀양 가 있는 틈을 타 음운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태어난 한글은 암클, 언문 등으로 불리다가 20세기에 들어 언어학자 주시경에 의해 정리, 발전되면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한, 그래서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 일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 중에는 최만리와 하위지가 있었는데, 최만리는 청백리로 인정받은 인물이지만 세종을 높이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폄하된 면이 있다고 평가된다.

▲과학 기술 발전 등 다양한 업적

세종대왕은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신분과 관계없이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관기의 아들인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 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했다.

이종무를 파견해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도 세종 대의 일이다. 그밖에 법전과 문물을 정비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 유교를 정비한 업적도 있다. 불교에 대해서는 초창기 억압책을 썼으나 후대에 완화했다.

▲가족관계와 만년

재위 초반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광평대군, 평원대군이 잇따라 목숨을 잃는 등 자녀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세종 본인 역시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됐다.

중풍, 요로결석, 노안에 자주 시달리면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됐고 세자의 섭정을 하려던 계획도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됐다.

만년의 세종대왕은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해 자주 온양행궁에 행차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대식가인데다 몸집이 비대했다는 기록도 있다.

1450년 음력 2월 17일 소갈증(당뇨병) 합병증과 중풍등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종은 54세를 일기로 영응대군의 사택인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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