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5월 14일] 헌법재판소, 故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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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5월 14일] 헌법재판소, 故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기각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5.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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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대한민국 건국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당시 대통령인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로 통과시켰던 탄핵소추안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기각된 날이다.

당시 대통령의 직무 정지로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고 헌재의 기각으로 노 대통령은 탄핵 소추 64일만에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 경과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대한민국 국회는 2014년 3월 12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고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함께해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소추안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노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이뤄진 탄핵소추안 가결로 타당성에 대한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70% 정도의 국민이 탄핵소추안 통과에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도 발표됐다.

KBS, MBC, SBS 등 방송사들은 탄핵 투표 당시 국회의 혼란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방영했고 전국에서 많은 국민들은 광화문 일대 등에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시위를 벌였다.

그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에 기각 결정을 했고 노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했다.

판정이 내려지는 동안 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국민들이 모여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실시 많은 충돌 등이 있었다.

▲ 과정

2004년 2월 18일 경인지역 6개 언론사의 합동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발언해 특정정당 지지를 유도한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24일에 있었던 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과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발언해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그해 3월 3일 중앙선관위는 노 대통령에게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을 위반했다고 판정하고 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고 다음 날 노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에 납득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3월 5일 야당인 새천년민주당은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 긴급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및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고 선언하고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에 탄핵안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 정략적인 압력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탄행 소추 당시 정당별 국회 의석수
당시 정당별 국회의석수

3월 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 새천년민주당 의원 51명이 서명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됐고 자유민주연합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3월 11일 특별 기자 회견을 열고 사과 요구를 거부하며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노건평에게 3000만원을 건넸다는 의혹에 대해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해 남 사장은 한남대교 밑에서 투신자살하고 탄핵에 반대하던 자유민주연합이 당론을 선회해 탄핵안 가결로 정했다.

국회는 3월 12일 오전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의회 단상을 점거하고 저항 했지만 제2차 임시회를 개회하고 탄핵안을 가결 시켰다.

이후 헌재에서의 1차, 2차 변론 등에 양측은 절차적 정당성과 부당성을 각기 주장한 가운데 노 대통령 측은 29명의 증인을 신청했다.

탄핵 기간 중 실시한 17대 총선에선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고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은 대참패했다.

헌재에선 이후 총 7차까지 변론이 진행됐고 2014년 5월 14일 오전 10시에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을 기각 결정했다.

▲ 탄핵에 역풍

당시 고건 국무총리
당시 고건 국무총리

탄핵안이 발의된 3월 9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탄핵반대는 65.2% 찬성은 30.9%였지만 노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6%,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견은 30.1%로 조사됐다.

국회는 탄핵소추 사유에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고 밝혔다.

당시 탄핵에 반발한 이른바 탄핵 역풍으로 2004년 4월 15일 제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국회 과반수를 획득했다.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이 최초로 원내 과반을 차지하게 됐다.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때 선봉 역할을 한 '탄핵 5인방'이라 불리는 박관용 국회의장,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홍사덕 총무,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유용태 원내총무는 정계에서 물러났다.

총선 때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삼보일배를 한 새천년민주당 추미애 선대위원장도 총선에서 낙마하고 유학길에 올라야 했다.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도 총선에서 탈락했고 이후 추미애, 조순형과 친박연대로 복귀한 홍사덕은 차기 보궐선거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탄핵 반대 촛불 시위로 1명이 자살하고 1명은 분신해 부상을 겪는 일도 있었다.

▲ 탄핵에 대한 평가

당시 다수당에 대해 대통령이 정치적 편향성을 보임으로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치게임을 벌여 정치 불안과 국내 경제계의 충격, 국가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경제위기에 파장이 됐다는 의견이 많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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