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17일] 청나라-일본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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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17일] 청나라-일본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4.17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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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일본어판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어판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95년 4월 17일은 청나라와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강화조치를 위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날이다.

체결 장소는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로, 발효일은 5월 8일부터였다.

청일 양측은 3월 20일부터 청일전쟁의 강화회의를 진행했다. 이 조약의 정식명칭은 일청강화조약으로, 당시 조선에서는 하관조약, 마관조약으로 불린다.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 사이에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5개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일본은 조약 체결을 통해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이 조선과 만주까지 지배력을 뻗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조선에서 청나라가 물러나고 명성황후의 요청에 러시아가 새로 일본의 조선 지배욕을 방해하게 된다.

▲청일전쟁과 그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청일전쟁을 벌였다.

당시 청나라 왕조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고 난징조약을 체결, 문호를 개방했다. 1860년에는 영불 연합군에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한 이후 조정은 양무운동을 전개하며 서양의 신식 문물과 무기를 받아들였으나 보수파의 반발과 서양의 겉모습 모방에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청일전쟁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퇴보와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양무운동의 한계를 보여준 전쟁으로 평가된다.

한편 쇄국 상태로 주변의 사회 정세에 대해 무지했던 조선은 국토가 전쟁터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며, 일본의 조선 지배 야욕은 조금씩 노골화됐다.

▲조약 진행 과정

일본 혼슈 서쪽 끝에 위치한 시모노세키는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1895년 3월 19일 청의 전권대신 이홍장이 도착한 후 1개월 동안 동아시아를 뒤흔들게 되는 회의가 개최됐다.

일본 측 대표로는 조슈 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가 나섰다. 이미 그들은 10년 전이었던 1885년 톈진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 얼굴을 익힌 적이 있었다.

1895년 3월 20일부터 회담이 시작된 이후 3일 만에 일본은 보병 1개 여단을 대만 서쪽 펑후 제도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 숙소로 돌아가던 리훙장이 테러를 당하면서 회담은 잠시 중단됐다가 4월 8일 그가 복귀하고 나서 급진전됐다.

▲5개 항목의 주요 내용

시모노세키 조약의 첫 항목은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할양하게 됐다.

일본에 지불할 배상금은 2억 냥으로 책정됐다. 이는 당시 청나라의 3년 치 예산, 일본의 4년 반 치 예산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그밖에도 청나라는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를 개항하고 일본 선박의 장강 및 그 부속 하천의 자유통항 용인, 그리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결정적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가지는 권리를 모두 박탈시켜 대륙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이던 청나라를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의 영향

청일전쟁의 패배와 일본과의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는 그 무력함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세계 열강국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은 더욱 노골화됐다.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됐다.

그러나 이후 요동반도는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됐으며 조선의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다.

이에 일본은 1895년 음력 8월 20일 미우라 공사가 지휘하는 2개 대대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시켜 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저지른다.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자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은 적지 않은 치명타를 입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 신해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제국은 러시아제국과 치열한 대립을 펼치게 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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