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경북 김천 연화지(鳶嘩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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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경북 김천 연화지(鳶嘩池)
  • 최애영 사진기자
  • 승인 2020.04.0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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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 연화지(鳶嘩池) 야경.장노출 58초.아침과 저녁의 기온차가 너무 심하여, 봄 옷을 입고 야경촬영을 나가서 봄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찍었다.
경북 김천 연화지(鳶嘩池) 야경.장노출 58초.아침과 저녁의 기온차가 너무 심하여, 봄 옷을 입고 야경촬영을 나가서 봄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찍었다.
야경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낮에 본 연화지(鳶嘩池).해가 연화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야경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낮에 본 연화지(鳶嘩池).해가 연화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경북 김천 연화지(鳶嘩池)

교동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김산현(金山縣)과 동잠현(桐岑縣), 김산군(金山郡)의 관아가 위치했던 이 고장의 오랜 읍치(邑治)이자 문화의 중심이었다. 1914년 일대의 마을을 교동과 삼락동(三樂洞) 문당동(文唐洞)으로 나누어 금릉면(金陵面)으로 개편하였다가 1931년 금릉면이 김천읍(金泉邑)에 편입되었고 1983년 교동, 삼락동, 운당동을 합해 금산동(金山洞)이라 했다. , 김산골, 동부, 서부, 구읍으로도 불렀는데, 김산골은 옛날 김산군의 관아가 이곳에 있었음(법원앞관청유적지공원)으로 해서 붙은 지명이며 구화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의 중심을 관류하는 소하천(지금은 복개됨)을 경계로 동부(교동)와 서부(삼락동)를 각각 일컬었습니다. 구읍은 이 지방의 중심이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평화동, 남산동 일대로 이동하면서 예전의 읍이라는 뜻으로 구읍(舊邑)이라 했다. 김산관아와 함께 중심축을 형성한 김산향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1530년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산향교 터에는 신라 때 창건된 고산사(孤山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연화지(鳶嘩池)와 봉황대(鳳凰臺)는 김산향교와 함께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적으로 봉황대는 경상북도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황대는 사방 3칸의 2층 다락으로 1700(숙종26) 창건되어 읍취헌(邑翠軒)이라 이름하였다.

원래 김산관아의 북쪽인 지금의 김천법원 자리에 있었는데 1838(헌종4)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인 연화지 중앙으로 옮겼다. 연화지는 1707년부터 1711년까지 김산 군수를 지낸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새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연()자에 바뀔화()자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 이름 지었고 그 날아간 봉황새의 방향이 읍취헌 쪽인지라 다락이름도 읍취헌에서 봉황대로 고쳤다. 따라서 연화지는 솔개이고 봉황대는 날아오르는 봉황새를 상징하는 것으로 솔개가 봉황이 되어 날아오르는 꿈이 실현되는 곳이다. 구읍의 삼락1동 지역은 옛날 관아가 있던 앗골과 뒷내골, 감옥이 있던 옥골로 나뉘어져 있었고 삼락1동과 삼락2동 사이인 지금의 스포츠타운 일대에는 떠돌아 다니는 혼령에게 수령이 제관이 되어 제를 드리는 여제단(厲祭壇)과 토지의 안전을 관장한다는 토신(土神)과 풍흉(豐凶)을 관장한다는 곡신(穀神)에게 봄, 가을로 제사를 올렸다는 사직단(社稷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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