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14일] 독립운동가 안중근 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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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14일] 독립운동가 안중근 사형선고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02.14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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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 직후의 안중근
단지동맹 직후의 안중근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안중근의사의 사형언도를 받은 날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중추적 인물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암살, 이듬해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형선고 이후 다음달인 3월 26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생애 초기의 안중근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 약 400석의 토지를 보유했다고 한다.

태어날 때 그의 등에는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고 불렸다.

1884년 갑신정변 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이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다.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으며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에 취미를 붙이며 명사수로 성장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독립운동 투신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한 안중근은 교회의 총대 역할을 맡는가 하면, 뒤에 만인계의 채표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상하이로 향했다.

하지만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에게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부친이 사망한 후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자기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서 삼흥학교를 설립,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했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했으나,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하얼빈 거사와 재판 과정

초대 한국통감인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만주의 하얼빈 역 혹은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로 계획됐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됐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의 지원을 받아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거사 당일,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됐고 최재형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했다.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이 안중근을 변호하기로 했으나 안중근은 일본 제국 정부로 넘겨져 관동주 뤼순 감옥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처형됐다.

재판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고 전해진다.

▲안중근의 죽음과 영향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으나 처형된 후 한 일본 간수가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 했으나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들었다.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순국은 수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후 매년 그를 기리고 헌화와 참배를 했다.

중국 내에서도 량치차오, 장타이옌, 쑨원, 위안스카이 등이 추모와 애도의 글을 발표했고, 1927년부터 중화민국에서는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안중근을 기리는 노래를 합창하게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토 사살이 한일합병을 앞당겼다는 분석도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이 이미 병합조약에 대해 의견 일치를 봤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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