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월15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백산 지청천 장군’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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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월15일]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백산 지청천 장군’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01.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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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 ‘지청천’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타계했다.

지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휘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해 광복군사령관·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치가, 정당인으로 활동했다.

지청천 장군
백산 지청천

▲출생, 무관학교 입교

지청천은 1888년 국운이 기울어질 무렵, 지금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지재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이 때 일본 측은 선심을 써서 재학 중인 1, 2학년생도 50여 명을 일본의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 위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청천은 동기생 및 후배들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유학 도중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로 편입되었고, 1914년에 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진급한 후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했다.

▲ 독립군 활동

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었고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했다.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으며,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했다.

양기탁, 오동진 등과 정의부, 후에 새로이 통합된 혁신의회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저격당한 후인 1930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독립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1935년 김원봉·김규식의 민족혁명당에 참가했으나 김원봉과 갈등하다가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에 대한 유화와 포용 책을 펼치자 반발해 1937년 4월에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했다.

▲ 광복군 항일전 수행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7년 4월 22일 김포공항, 지청천 장군의 귀국을 영접하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1940년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한 지장군은 그해 9월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광복군 1,2,3지대 역시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각자 자기 파벌의 세력 확장에만 치중, 지청천 장군은 명목상 사령관이었지만 이들을 통솔하기는 어려웠다.

1945년 광복 후 이듬해인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대동 청년단’을 창설했다.

▲ 귀국

그가 귀국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청년단체를 만들 것을 권고한다.

1946년 9월 지청천은 대동 청년단에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우익청년단체인 대동 청년단을 확대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했다.

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을 견제하려던 이승만은 지청천이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대동 청년단에 족청을 흡수시켰다. 이후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사망

1957년 1월 15일 사망했다. 장례는 1월 21일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거행되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62년 건국훈장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1995년 삼청동 집터에 ‘지청천장군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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