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21일] ‘헤이그 특사‘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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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21일] ‘헤이그 특사‘ 이준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1.2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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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859년 오늘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국민교육회 회장과 헤이그 특사단 부사를 역임한 이준이 출생한 날이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던 그의 유해는 1963년 국내로 옮겨와 서울 수유리에 국민장으로 안장됐다.

계몽활동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재직하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한 이준은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귀국한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적극 나섰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만들어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그는 교육구국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고 함경도 유지들을 규합,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해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을 벌였다.

그는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를 설립하고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순국

당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이런 활동을 하던 그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파견했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 자체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조약으로 무효임을 세계 열국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

밀서를 받은 이준은 1907년4월22일 서울을 출발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헤이그특사단 정사 이상설과 합류한 이준 일행은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를 만나 함께 헤이그에 도착했다.

특사단은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인 참석,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특사단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지만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상훈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출처: 다음백과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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