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6월 민주항쟁 도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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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6월 민주항쟁 도화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1.1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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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1987년 오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수사관들의 고문으로 사망한 날이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으나, 1987년 5월 17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사건의 은폐 조작에 가담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정권 규탄 시위를 촉발시키며 이후 6월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물고문과 고문치사

1987년 1월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은 자신의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 의해 영장없이 불법으로 강제 연행됐다.

경찰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를 불라며 참고인 신분의 박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폭행과 물고문을 가했다.

박 군은 이날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숨지게 된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을 하면서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라며 단순 충격사로 공식 발표했다.

이 사실은 하루만에 뒤집어진다.

당시 박군을 부검의한 오연상 내과의가 '509호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고 자신이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박군이 사망한 상태였다'라는 증언이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됐다.

경찰은 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박종철군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임을 시인하고, 그 후 고문에 가담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2명을 구속했다.

하지만 경찰은 부검을 거친 박 군의 시신을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은폐조작과 민주화 운동의 발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와 관련, 경찰의 조직적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고문가담 경관을 축소 조작했다고 밝혔다.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등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당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시민들의 분노는 정권 규탄시위로 이어져 1987년 6월항쟁의 중요한 계기로 되어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출처: 위키백과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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