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7일]조선 개혁의 주역 '서재필'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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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7일]조선 개혁의 주역 '서재필' 탄생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01.07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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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 기자 ] 1864 년 오늘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이며 , ‘독립신문’의 발간과 ‘독립협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서재필이 태어난 날이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근대화 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독립신문’ 창간 이후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1948년 당시의 의학박사 서재필
1948년 당시의 의학박사 서재필

생애와 활동

서재필 박사 (실제 그는 의학박사였다 )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이 개화에 눈뜬 김옥균 , 박영효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

서재필은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 , 도쿄의 도야마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한다 .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조련국을 설치하고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 일 천하로 끝났다 .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갔다가 1885 년 4 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전공, 미국으로 귀화한다 .

갑오개혁으로 그가 갑신정변 때 쓴 ‘역적 ’죄를 벗게 되면서 1895 년 귀국한다 .

귀국 후 중추원 고문직 직함으로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다 . 이 때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한다.

그는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과 세계의 사정을 알리는 한편 ,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그를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여 , 미국인들에게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

1921 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해 활발한 독립 외교를 전개했으며 , 1925 년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송진우 , 백관수 , 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의 잔학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

광복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자 , 미군정장관 하지의 요청으로 1947 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으로 귀국했다 . 그러나 1948 년 8 월 15 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1977 년에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

 

*출처: 다음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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