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 2일] 연해주 항일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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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 2일] 연해주 항일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1.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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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연해주 지역에서 ‘조선의 나폴레옹’, ‘백마 탄 김장군’으로 유명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경천(金擎天, 1888년 6월5일~ 1942년 1월 2일)장군이 타계한 날이다.

'조선의 나폴레옹',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장군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린 김경천 장군

1993년 카자흐스탄에서는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 법률을 제정 김 장군의 명예를 회복 시켰다.

1998년 한국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2015년 그의 후손 일부가 한국으로 특별귀화 했다.

2015년 외증손녀 김올가의 요청으로 우당 장학회와 서울 종로구 사직동 그이 옛 집터에 표지석을 세우고 이듬해 1월 전쟁기념관은 1월 호국인물로 독립운동가 김경천을 선정했다.

▲ 군 입문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무관인 김정우(金鼎禹, 1857~1908)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경천은 군인인 아버지와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에 빠져있던 그는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 유년학교를 마친 뒤 1909년 12월1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무장 독립운동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부대원들과 함께한 모습
연해주 항일독립운동 당시 부대원들과 함께한 모습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경천은 육사 3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독립운동에 나선다.

그해 연말 만주를 떠난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며 의용군을 모집,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전쟁을 벌이면서 그의 이름을 시베리아 지역에 널리 떨쳤다.

그의 당시 활동사항은 1922년1월 동아일보에 연재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이중집)의 동부사령관을 지낸 김경천은 1923년 ‘상해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돼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와 국경경비대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5년 6월 부인 유정(柳貞,1892-1971)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져 종로서에서 수색중이라고 시대일보에 보도가 될 때 연해주로 가서 가족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수범은 이듬해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소련의 탄압과 구속

그는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해 체포된 뒤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를 받는다.

간첩죄로 체포 후 모습
간첩죄로 체포 후 모습

그 이유는 ▲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가 이르쿠르츠파와 상해파로 나뉘어 진 가운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에서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되거나 ▲둘째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아 체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었다.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2년 반을 복역한 그는 석방된 뒤 재차 체포돼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당시 그는 간첩죄가 적용되고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받아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에서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됐다.

그는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진짜 김일성 논란

김경천은 흰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특히 그는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일찍부터 '장군'으로 불린 인물이기에 북한의 김일성은 그의 이러한 명성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란이 된 가운데 풍문의 내용이 구구해 실존인물을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경천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 박상진(朴尙鎭,1884~1921) 의사의 행적을 기록,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에서 김경천은 김일성의 초명이라고 적었다.

박상진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에 김경천 장군이 ‘1921년에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썼다.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1888~1969)은 1918~1922년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 출병 때 당시 김경천이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또, 윤치영(尹致暎,1898~1996)도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경천이라고 했다.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고 김경천이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했다고 한다.

이명영(李命英,1928-2000)은 ‘김일성 열전(1974)’에서 처음으로 김경천 장군이 진짜 김일성이라 주장했고 그의 책에는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있다.

영웅의 일기 ‘경천아일록’

김경천이 군지휘관으로서 전투현장에서 쓴 생전의 일기이다.

이를 번역한 김병학 선생은 김 장군의 지략과 용맹, 친일유산의 청산과 장군의 행적등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전했다.

이 일기는 소련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던 1936년 압수당했다가 2006년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투당시의 현장을 직접 기록한 동서양에 유래가 드문 기록물로 평가 받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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