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13일] 광기의 일본군 '난징 대학살'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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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13일] 광기의 일본군 '난징 대학살' 자행
  • 김상옥 기자
  • 승인 2019.12.13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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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39년 12월 13일은 중ㆍ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뒤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 살육한 ‘난징대학살’을 시작한 날이다.

이듬해 2월까지 6주간 자행된 학살로 무려 30여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난징 대도살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서구권에서는 아시아의 홀로코스트로 알려져 있다.

학살당한 중국인 시체더미 옆에 서 있는 일본군
학살당한 중국인 시체더미 옆에 서 있는 일본군

▲중ㆍ일전쟁과 학살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해 중ㆍ일전쟁으로 확대됐다.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파죽지세로 점령했으나 상하이부터는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거세지며 전투가 장기화되고 일본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 해 11월 악에 받친 일본군은 통첩도 없이 난징으로 진격했고 이는 피비린내 나는 학살의 시작이었다.

▲아수라장으로 변한 난징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국민당 주요 관리와 부유층들은 재빨리 도시를 빠져나갔으나 인구 약 110만명에 이르던 대도시 난징은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중국군이 끝까지 투항하지 않자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버리고 양쯔강을 건너 도망쳤다.

이후 피난을 떠나지 못한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속에서 4~6주간 처참한 학살을 당했다.

▲광기에 휩싸인 일본군의 만행

난징에 들어선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인 남성들까지 마구잡이로 총검술 훈련용이나 목 베기 시합에 이용했다.

여성과 아이들도 살육을 피해가지 못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등 도시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성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 '선간후살'로 일본군은 여성들을 성노리개 삼아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피해자 중에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부터 60~70대 노파까지 포함돼 있었으며 수녀와 비구니 등 난징의 여성들은 무차별로 능욕을 당했다.

이 가운데 독일 나치스 당원이면서 지멘스 직원으로 난징에 체류하고 있던 욘 라베 등 소수의 외국인들은 국제위원회를 통해 안전지대를 조성해 20여만명의 중국인들을 대피시키기도 했다.

▲전범재판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6년 8월부터 전범 재판이 열렸으며 ‘살인시합’을 벌였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사형을 언도 받았다.

난징에서 살육을 벌인 또 다른 당사자인 다니 히사오 중장은 1947년 공개 총살됐다.

그러나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하는 등 핵심 인물들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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