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4일] 3일 천하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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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4일] 3일 천하 '갑신정변'
  • 여운민 기자
  • 승인 2019.12.0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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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갑신정변 또는 갑신혁명은 1884년 12월 4일 외척 중심의 수구세력을 몰아내고 개화파가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무력정변이다.

갑신정변은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하는 등 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을 목표로 한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평가도 받고있다

독립당이라 자처했던 급진개화파 세력들.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이다.
독립당이라 자처했던 급진개화파 세력들.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이 중심이 돼 우정국 개국 축하연때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문벌 폐지, 인재등용 등 혁신정강 14개조를 발표하는 등 의욕적인 개혁의 면모를 보였지만 민씨 정권이 청나라에 군대 개입을 요청하면서 3일만에 힘없이 무너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조선의 자주권은 크게 훼손되게 된다.

▲ 정변과 망명

1874년 이후 당시 상황은 정권이 흥선대원군에서 고종 친정체제로 바뀌면서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제물포항 부산항 원산항이 개항되고 문호개방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사회가 혼랍스럽게 변했다.

특히 외척 민씨세력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구식 군대가 봉기하는 임오군란이 터지는 등 정국의 혼란은 더욱 심화됐다.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파들은 조선의 번영을 위해 중국에 의존하려는 외척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해야한다며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D데이로 삼아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들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왕후를 확보했지만 명성왕후가 청나라에 군대개입을 요청하면서 개화파의 정변은 3일만에 진압됐다.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서재필
서재필

▲혁신정강 14개조

①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②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③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窮民)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④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⑤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⑥각 도의 환상미(還上米)는 영구히 폐지할 것

⑦규장각을 폐지할 것.

⑧시급히 순사를 설치하여 도적을 방지할 것.

⑨혜상공국을 폐지할 것.

⑩전후의 시기에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의 경중을 묻고, 무고한 죄인은 석방시킬 것.

⑪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고, 영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급히 설치할 것. 육군 대장은 왕세자로 임명할 것.

⑫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戶曹)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⑬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政令)을 의정, 시행할 것.

⑭의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정변의 평가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 갑신정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박은식은 이 사건을 한국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로서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점을 최대 단점으로 지적됐다.

서재필은 실패이유를 첫째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 둘째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참조:위키백과 다음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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