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21일] 태조 이성계 '조선 도읍 한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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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21일] 태조 이성계 '조선 도읍 한양 천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19.11.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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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의 정당성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적극적으로 주도, 개국 2년만인 1394년11월21일(음력 10월28일) 실시한다.

한양이 새 수도로 선택된 것은 한양의 주변 형세, 육로ㆍ수로 등 교통과 지리적 이점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 민심 쇄신, 풍수지리설의 영향 등이 수도를 옮기게 된 배경이다.

이후 경복궁을 쌓고 한성부의 영역을 성곽의 사대문과 성곽외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해 현재의 서울시의 강북지역 대부분이 포함되어있다.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한성이 크게 확장됐다.

한성 지도 '수전전도'
1840년경 한성 지도 '수선전도'

▲도읍지 건설

태조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했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됐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서쪽에 사직(社稷)을 완공하고 동쪽 종묘(宗廟)를 완성 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暑)를 배치해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과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약 17km의 성벽을 쌓았다. 1395년에 한양을 한성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그 행정구역은 도성과 성저로 구성했는데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을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 되는 한계선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 동쪽은 양주,송계원·대현·중랑포·장안평, 서쪽은 양화도·고양덕수원, 모래내를 따라 난지도 부근까지였다.

경조오부도
경조오부도

▲ 한성의 영역

조선 시대의 한성의 구역은 현재 서울보다 훨씬 협소했다.

동쪽은 낙타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목멱산, 북쪽은 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했지만 조선 건국 당시에는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했다.

이후 도성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성내에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성곽으로부터 십리 바깥까지의 지역을 ‘성저십리’라 칭하게 된다.

성저십리로의 인구 이동도 일어나 1461년 2월27일 성저십리는 공식적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됐다.

▲도읍 관리청 ‘한성부’

한성부는 도읍을 관리하는 중앙관청으로 인정받고 육조와 같은 격의 관청으로 대우했다.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법사라고도 불렸다. 서울의 호구, 시장 및 점포와 가옥 및 토지, 산, 도로, 교량, 하천 등의 관리와 재정 및 사법, 검시, 고실 등의 일을 담당했다.

한성부의 관할 영역은 한양과 성저십리였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십리까지로 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구가 도성 내에 집중되어 1428년(세종 10년) 한성부 인구 10만 3328명 가운데 도성 밖 10리까지의 인구는 불과 6044명 정도였다.

1894년경 한성의 모습
1894년경 한성의 모습

▲조선 중기, 후기의 한성

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1624년 인조 때의 병자호란 때 많은 피해를 입었던 한성은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 많이 복구가 되었다.

1876년 개항 이래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한성에는 새로운 문명시설이 갖추어져 가는 등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한성은 동아시아에서 전기, 전차,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최초의 도시가 됐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고 서대문과 홍릉 사이에 전차가 부설됐다. 인천~한성간 경인선이 개통됐다.

1895년 5월 26일 고종이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한성부를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으나 1년만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1910년 총독부령에 따라 경성부로 개칭되고 경기도에 편입되기도 했다.

*출처: 위키백과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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